콘텐츠/문화예술계 성평등 자치규약, 주체 불명확한 문장 논란... 협회가 선언하는 자치규약에 피해자가 주체로

지난 6월 12일(수), 콘텐츠진흥원이 CKL 기업지원센터에서 문화예술계와 콘텐츠 업계 협단체들과 함께 발표한 "성평등 자치규약 선포식"이 열렸습니다. 이번 선포식에는 영화, 방송, 게임, 대중문화, 만화, 웹툰, 애니메이션-캐릭터-패션 등 7개 분야가 참여했습니다. 공통 3개 문항과 선택내용 10문항으로 구성된 규약 내용은 각 협회, 단체별로 다른 내용을 선택했습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 성평등자치규약 문항

한국만화가협회, 한국여성만화가협회, 한국웹툰작가협회 등 만화분야에서는 4,5번 항목을 채택하지 않았고, 웹툰협회는 4,5,10번을 채택하지 않았습니다. 일각에서는 협회의 성격에 따라 달라진 것 아니냐는 문제제기가 있었지만, 문항을 읽어 보면 그 이유가 드러납니다. 공통 선언의 경우 선언의 주체가 "우리", 즉 협회 등 단체 구성원입니다.

선택 내용의 1~4번의 경우에도 실천의 주체를 구성원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4,5번 문항의 경우 "성희롱, 성폭력 등 성범죄 피해시 불쾌감을 드러내고 거부하거나(4번), 성범죄 이슈 발생시 숨기지 않고 즉시 알린다(5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주체가 "전 구성원"이 아닌 "피해자(생존자)"로 읽을 여지가 생깁니다.

하지만 성범죄의 경우 자신의 고통과 이후에 닥칠 2차 피해 때문에 공론화를 원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피해자가 공론화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적 분위기에 문제제기를 하기보다 "피해자가 신고해야 한다"는 조항을 규약에 포함시킨 것이어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주체가 협회라면 피해자가 신고하는 것을 당연하게 만들고, 신고하지 않으면 마치 피해자가 잘못이라는 뉘앙스를 줄 수 있기 떄문입니다.

"성범죄 처벌 이력이 있는 자 또는 처벌 이력이 있는 자가 포함된 단체는 입회를 거부하여 성폭력 이슈를 사전에 예방한다"는 10번 문항 역시 서로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처벌 이력'이라는 말이 형법상의 처벌을 말하는 것인지, 또는 협회의 정관 등 내부 규율에 의한 것인지가 불분명합니다. 설령 형법상의 처벌일 경우라 하더라도 현행법상 범죄경력조회 신청은 일부에 제한적으로, 본인 동의를 받아서 조회할 수 있어 문화계 협단체가 이를 시행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따릅니다. 무엇보다 협회 등 단체가 선언하는 자치규약이 의미를 가지려면 '협회'의 역할을 강조했어야 한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CTS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NOTINOURHOUSE" 해시태그

콘텐츠성평등센터(BORA)에 이와 같은 사항에 대해 문의하자 "이번 자치규약은 법적 영향력은 없으며, 선언적 의미를 갖는다고 보아주셨으면 합니다"라며 "이번 자치규약은 시카고 극장 규약(Chicago Theatre Standards)등을 참고해 만들었으며, 선택조항의 경우 말 그대로 각자 인식수준이 다른 협, 단체별 실정에 맞게 선택할 수 있도록 만든 것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시카고 극장 규약(CTS)중 구두 선언문 샘플중 일부. "예술가는 아래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가진다"라는 문항이 보인다.

하지만 시카고 극장 규약의 경우 "성희롱/폭력"의 주체에서 권리가 있는 당사자를 예술가(Artists)로 명시하는 한편 피해자의 책무가 아닌 피해자의 권리를 중심으로 낭독 규약 부문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범죄 또는 그에 대해 말할 수 없는 분위기가 예술가들의 작업환경을 "중독"시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CTS 목차. 다양한 기본권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또한, 33페이지에 달하는 내용을 통해 역사적 배경, 용어의 정리, 규약의 목적, 분야별 규약 등 세분화한 내용을 공유했습니다. 시카고 극장 규약의 경우 '극단'이라는 하나의 상황에 세부적인 내용을 실었습니다. 더불어 시카고 극장 규약은 20여개 극단이 참여해 만들었다는데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제대로 완성된 문장으로 성범죄를 근절하겠다고 말하는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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