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우리만화] 치유의 음식에 대한 사무량심(四無量心)의 드라마

"세화, 가는 길"의 메인 이미지 (출처=카카오페이지)

*이 글은 1-15화까지 제1장에 대한 리뷰입니다.

음식만화는 이제 낯설지 않다. 음식만화는 일본에서 시작된 장르다. SF, 판타지, 로맨스, 호러, 추리, 스릴러 같은 장르는 소설이나 영화, 라디오극 등에서 시작되어 만화에 영향을 주었지만, 음식만화는 만화에서 출발했다. <심야식당>(아베 야로)이나 <식객>(허영만)처럼 만화원작을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하기도 한다. 대결의 세계에서 더 맛있는 음식을 만들기도 하지만, 음식 하나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인간의 삶은 ‘먹고 사는’ 문제이니 음식 안에 위로가 있다. 삶이라서 그렇다.

‘모든 것이 잿빛이있다. 그 사람이 재가 된후부터. 아니, 재가 되기 훨씬 이전부터.’ 사랑하는 사람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반혼재 자리.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슬픔의 당사자인 세화는 반혼재 자리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그만 돌아가. 울 엄마 너 보면 또 쓰려지셔. 재윤이 죽은 거 다 너 때문이라고 생각해.” 절에서 내려가는 길에 고양이 보리를 만나고, 스님이 가져다준 공양주 보살님의 약과를 전해 받는다. 세화는 1시간 45분 뒤 올 버스를 기다리다 배가 고파 약과를 먹는다. 문득 재윤이가 좋아할 맛이라 싸 가려다 가져가도 좋아해 줄 사람이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이렇게 맛있는데.’ 세화의 눈물이 클로즈업된다. 감정을 전하는 클로즈업 컷은 주로 정면을 바라보는데, 세화는 왼쪽을 바라본다. 눈물의 감정을 세상을 떠난 재윤과 함께 하고 우리는 옆에서 동참한다. 1화의 눈물 흘리는 클로즈업 컷으로 우리는 세화의 마음과 하나가 된다.


밥은 일상이다. 재윤이 떠나고 세화의 일상이 흐트러진다. 결국 ‘혼자 맞은 주말이 감당이 안 되어서’ 무작정 세화사를 찾아갔다. 아침 공양 시간에 버섯들깨죽이 나왔다. 원래 아침을 안 먹는 세화, 늘 아침을 먹어야 했던 재윤. 버섯들깨죽 하나를 다 비운다. 세화는 아침 공양 후 보살님의 심부름으로 차와 다과를 가지고 주지스님에게 간다. 세화가 뭔가 말을 해야할 것 같아 “저…감사합니다.”라고 입을 떼자, 주지스님은 “말을 하자는 게 아니라 그냥 차 한 잔 하는 거예요. 딱 그것만 하십시다.”라고 말한다. 나란히 앉아 멀리 산을 바라본다. 그러다 세화는 깜빡 잠이 든다. (2화) 모처럼의 평안함이다. 사찰 음식이라고 화려한 꾸밈이 나오지 않는다. 밥은 일상에서 우리를 위로한다. 제대로 식사를 못하다 모처럼 식곤증에 잠이 드는 세화처럼.

주말이면 습관처럼 세화사행 버스를 기다리는 세화. 크리스마스 연휴에 도착한 세화사에서는 다음날 있을 동지법회 준비가 한창이다. 동지법회에는 맛있는 동지팥죽을 먹는다. 세화도 공양간에 가 새알심을 빚는다. 새알심은 각각이지만 누구도 탓하지 않는다. “옛부터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지에 팥죽을 먹고 악귀를 쫓았다고 했지요. 긴긴 밤에 찾아오는 저마다의 악한 마음을 이 팥죽 한 그릇으로 다스려봅시다.” 주지 스님의 말씀. 팥죽 한 그릇이 악한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까? 세화는 ‘악한 마음처럼 두려운 악몽들도 그렇게 다스릴 수 있을까.’ 생각한다. (3화) 사람 한 명 한 명에게는 사연이 있고, 그 사연처럼 두려운 악몽들이 있다.


세화사에서 열리는 재윤의 49재. “49재라니까 진짜 보내는 것 같아서 한숨도 못 잤어요.”라는 세화에게 주지 스님은 “어디까지나 형식일 뿐입니다. 마음이 아직 떠나보내지 못한다면 그냥 지니고 있어도 괜찮습니다.”라고 말한다. 49재 후 함께 하는 식사 자리에서 재윤의 어머니는 재윤이 호박을 좋아했다고 말하고, 세화는 재윤이 호박을 싫어했다고 기억한다. ‘내가 알던 재윤과 그들이 알던 재윤은 다를 것이다.’ 부처님은 내 안의 불성을 통해 나를 변화시키려 했지 타인을 나의 뜻에 맞게 변화시키라하지 않았다. 세화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재윤에게 어떤 사람이었을까.’(4화) 이 질문은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사람이었을까. 우리는 타인의 다름을 받아들이고, 내 안의 불성을 깨울 수 있을까? 회빙환의 웹툰 세계에서 <세화, 가는 길>은 조용히, 낮은 목소리로 묻는다.

세화는 세화사 공양간에서 함께 만두를 빚는다. 꼭 그 때가 되어야만 먹을 수 있는 음식. 강오 처사는 새알심도, 만두도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완성한다. 세상이 제일 어두워지는 섣달그믐 밤. 보리를 안고 고개를 파뭍은 세화에게 주지스님이 말한다. “그만 들어가십시다. 세상에서 제일 따뜻한 떡만둣국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5화)

3월이 되어 늦은 눈이 폭설이 되었다. 다른 이들은 퇴근을 걱정하는데, 세화는 내일 세화사에 갈 수 있을지를 걱정한다. 눈 때문에 길이 막혀 멀리 떨어진 곳에 내려 산길 2km를 걸어간다. 힘들게 눈쌓인 산길을 걷는 세화 앞에 또 다른 절 고양이 타리가 나타난다. 다음 날 눈 밑에서 냉이를 캐 냉이된장국을 끓인다. 세화는 어릴 적 먹었던 ‘씁쓸한 흙맛 뿐’이던 냉이된장국을 떠올린다. 그리고 지금 먹는 씀쓸한 흙맛인 냉이된장국에서 얼었던 흙이 녹은, 길었던 겨울이 끝나는 맛을 느낀다. (6화) 겨울은 끝났지만 여전히 세화의 마음은 아직 겨울일 것이다.

죽은 재윤의 흔적이 남은 자동차를 폐차하고 다시 세화사를 찾은 세화. 새벽같이 산에 올라 나물을 채취한다. 기억은 세화를 괴롭힌다. “대체 나한테 왜 그래? 내가 뭘 어쨌다고? 나더러 뭘 어쩌라고!! 내가 어떻게 했어야 했는데!” 주지스님과 바랑 가득 두릅을 따 돌아와 식사를 한다. 딱 짧은 시간에만 먹을 수 있는 민들레 김치가 나왔다. 젊은 희로 보살은 1년을 기다려야 해서 먹을 수 있는 아쉬운 김치라고 하지만, 공양주 보살은 “제 나이가 되면 한해 한해가 어찌나 금방 가는지 달포쯤 전에 먹은 것 같은데 금세 다시 눈이 내리고 다시 내년의 민들레김치가 돌아온답니다.”라고 말한다. 생각보다 짧은 시간. 이 시간이 세화의 기억을 무디게 해 줄 수 있을까. (7화) 자연스럽게 다음 화로 손이 간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습관 같은 그 이름에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 이번 주말에 함께 내려오라는 전화가 집에서 온다. 초파일이 되어 다시 절을 찾은 세화. 익숙한 이들이 공양간에 모여 초파일 공양할 비빔밥을 만든다. 오월이 되어 설레는 맛을 먹는다. (8화)

재윤의 생일이 가까워지고, 세화는 세화사를 찾는다. 공양주 보살님도, 주지스님도 없어 젊은 동주 스님이 칼을 잡는다. 제사를 지내고 남은 절편으로 만든 고추장 떡볶이와 간장 떡볶이. 세화의 눈에 눈물이 흐른다. 마지막 생일 세화가 바빠 예약한 레스토랑에 가지 못하고 재윤이 좋아한 로제 떡볶이를 시켜 먹었다. ‘재윤이가 정말 좋아했을 텐데.’ 동주 스님은 보살님의 떡볶이를 처음 먹을 때 있었던 에피소드를 조용히 들려준다. ‘모든 순간들이 떠오르고 걷잡을 수 없이 감정이 끓어올랐습니다. 그때 주지 스님이 말씀하셨지요.’ “밥 먹을 땐 밥만 먹어라.” (9화) 우리는 조금씩 비무량심(悲無量心), 슬프게 여기는 마음을 일으켜 한없는 중생의 미(迷)한 고통을 건져내어 해탈의 낙을 얻게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세화의 발을 보리가 어루만진다.


여름이 되어 ‘모든 기억들이 스며 있어서 정리’하고 싶은 집이지만, 치솟는 부동산 가격에 계약을 갱신한다. 지난번 눈이 많이 왔을 때 걸어갔던 산길을 구지 택해 힘들게 걷는다. 세화사로 올라가던 길에 오이를 수확하는 동주 스님을 만난다. 점심 공양은 오이국수. 신혼여행에서 죽은 신랑의 제가 열린다. 상복을 입고 비를 맞고 있는 신부에게 우산을 건낸다. (10화) 자무량심(慈無量心), 진정한 불자라면 타인을 대할 때 성내지 말고, 싫어하지 말고 만인을 평등하게 사랑하여야 한다. 조금씩 세화도 타인의 아픔을 보게 된다.

재윤의 가족들은 보험금을 나눠달라한다. 회사에서 팀이 합쳐진다. ‘진흙탕에 발을 담근 기분’을 느낀다. 아버지에게 돈을 빌려준 이가 젊은 희로 보살을 찾아와 큰 소리를 낸다. 세화는 얼룩강낭통(호랑이콩) 밭 사이에 숨어 사건이 끝나기를 기다리다 익은 콩을 따준다. 빚쟁이가 떠나고, 희로 보살도 떠난다. 세화는 공양간에서 나는 호랑이콩을 듬뿍 넣은 갓 지은 밥 냄새를 맡는다. (11화) 자비의 마음은 기쁨에 다가간다. 곧 희무량심(喜無量心)이다. 세화가 맡는 갓 지은 밥 냄새가 내 코에도 맡아진다. 희무량심의 기쁨이 마음에 조금씩 퍼진다.


콩을 가득 따와 공양간에 들른 세화. 백중절(우란분절)이라 공양간에 사람이 많다. 절에서 초파일 다음으로 큰 행사. 공양주 보살님이 연잎밥을 짓고 있다. 사람이 많이 와 연잎이 부족하자 희로 보살이 세화에게 함께 연잎을 따러가자고 말한다. 연꽃이 가득 핀 진흙밭 속에 주지스님이 미리 와 연잎을 따고 있다. “연꽃은 사바세계에 뿌리를 두고 더러운 진흙탕에 있어도 물들지 않았으며 그 맑은 향과 고고한 아름다움으로 세상을 정화한다지요. 부처님은 세상의 모든 인간이 연꽃으로 보였다고 하는데.” 주지스님의 말 뒤 세화는 ‘우리는 아직 꽃봉오리도 맺지 못하고 진흙 속에 묻혀 있나 봅니다. 그래서 주변도 온통 흙탕물로 보이나 봅니다.’라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진흙 속에서 싹을 틔우는 연꽃 씨앗. (12화)

바빠져 두어달 못 들른다는 세화에게 공양주 보살님은 한보따리 재료를 싸 준다. 고구마, 배추, 된장. “한동안 안 오시면 생각이 나실 겁니다.” 세화는 바쁘게 일하며 배달음식으로 입치레한다. 배가 고파도 배달음식은 질리고 세화사의 밥이 그리워진다. 텅빈 냉장고에서 보살님이 싸준 재료를 꺼낸다. 배추를 잘라 된장국을 끓이고, 배추전을 만든다. 슴슴한 배추와 된장의 맛에서 세화사에서 먹던 맛을 느낀다. ‘그냥 배추일 뿐인데, 꼭 세화사사에 있는 것 같다.’ (13화) 이젠 세화의 마음도 조금씩 슴슴한 세화사의 배추 음식을 닮아갈까.

김 과장과 함께 하던 프로젝트를 혼자 진행하게 되었다. 짐을 싸들고 세화사를 찾는다. 풀리지 않는 일에 답답해 하다 바깥이 시끄러워 나가보니 배추가 가득. 얼이 나가보이는 동주 스님. 알고 보니 원래 김장 예정일은 다음주였지만 한파가 닥친대서 날짜를 댕겼다. 하필 공양주 보살님은 검진 예약일. 동주 스님이 김장을 지휘해야 한다. 1년 사찰 음식을 좌우하는 김장. 동주 스님은 안절부절이다. 어찌어찌 김장이 끝나고, 병원에서 영상통화가 걸려 온다. “김장이 너무 맛있게 되어서 좋아한 해는 정초부터 김치가 떨어져서 고생을 하고, 맛없는 해는 오래오래 먹을 수 있어 좋기도 하고.” 뭐든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다. (14화)

미용실을 들려 머리를 자른 세화. 집에 돌아와보니 택배상자가 와있다. 엄마가 보내준 미역국이랑 밑반찬. 내일이 세화의 생일이다. ‘1년.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나는 버텨냈다.’ 세화사를 찾은 세화는 더이상 눈물 흘리지 않는다. ‘나의 이름과 같았던 이곳 이 음식들이 나를 버티게 했다.’ 점심 공양에 미역국이 나온다. 세화는 요새 보리와 타리가 자기에게 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자 동주 스님은 보리는 슬픈 사람을 찾아 위로해주고, 타리를 화난 사람을 찾아 대신 화를 내 준다고 말한다. “세화 보살님은 지금 슬픔도 분노도 없나봅니다.” (15화)

1년이 지났다.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마음은 슬픔과 분노를 넘나들었다. 그럴 때마다 세화는 자신도 모르게 세화사를 찾았다. 음식을 먹었다. 사람들을 만나고, 일을 했다. 사무량심(四無量心), 모든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고 괴로운 마음과 미혹을 없애기 위한 남에게 즐거움을 주려는 자(慈), 남의 괴로움을 덜어주려는 비(悲), 함께 기뻐하려는 희(喜), 남을 평등하게 대하는 사(捨)의 마음이다. 마침내 세화도 사무량심의 덕을 얻는다.

불교란 결국 사무량심의 세계다. 사찰음식은 화려한 멋이 아니라 자비의 사상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행위다. 세화가 세화사에서 여러 이들과 만나고, 음식을 먹는 과정에서 슬픔도 분노도 떨어버린 것처럼, 이 만화를 보는 많은 이들이 진정한 사무량심 광대한 마음으로 들어가기를, 그리하여 크고 작은 슬픔과 분노를 세화처럼 치유받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글 : 박인하(만화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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