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야담(野談) 다음이 필요하다​ - SWI PREMIUM

우리에겐 야담(野談) 다음이 필요하다​

이야기는 인간의 본성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이야기는 인류의 역사에서 꽤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겠죠. 지금 우리에게 이야기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인류 역사에서 대부분 이야기는 구전되거나 민족, 지역, 더 좁게는 가정에 따라 전승되곤 했습니다. 기록으로 이야기가 남은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죠.

기록된 이야기는 그만큼 가치가 있거나, 의미가 있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대부분 저자의 권위에 기댔습니다. 이를테면 많은 종교들의 성서가 그렇습니다. 선지자들이 직접, 또는 천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들었다는 신의 음성을 적어 기록한 책이니까 엄청난 권위를 가지고 있었겠죠.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인 직지심체요절은 부처와 고승들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고, 금속활자의 대중화를 이끌어낸 구텐베르그 성경 역시 ‘성서’라는 점을 봐도 그렇습니다.

한동안 활자로 기록하는 매체에 글을 싣는 것은 그 자체로 권력이었습니다. 자원이 귀했던 시절에 인쇄를 한다는 행위 자체가 그랬고, 또 글을 아는 사람들 자체가 적으니 읽을 사람들도 권력을 가진 사람일 가능성이 컸습니다. 자연스럽게 ‘지도층에게 글을 통해 무언가를 전하는 사람’이라는 위치는 권력과 가깝거나, 권력 그 자체일 가능성이 컸죠. 그리고 근대가 시작되면서 이 권력이 해체됩니다. 롤랑 바르트라는 철학자가 말한 “저자의 죽음” 같은 얘기를 굳이 꺼내지 않더라도, ‘작가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조금 어색해지고 있죠. 그냥 작가님이나 작가라고 부르니까요.

* 들판에 떠도는 이야기, 야담

그렇게 권력자들만 이야기를 했느냐, 그럴 리 없죠. 인간은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랬습니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구전되어 전승되는 것을 민담(民譚), 혹은 야담(野談)이라고 합니다. 민담은 민간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 흥미 위주의 ‘허구’적 이야기를 말합니다. 현대적 언어로 해석하면 ‘썰’이라고 할까요? 근데 거기에 환상성을 더해서 누가 들어도 환상적인 이야기인 경우가 많죠. 민간에 내려오는 설화, 그런 이야기들을 총체적으로 부르는 말이 ‘민담’입니다.

민담은 한중일 모두에서 보이는 성격인 반면, 야담은 한국에서만 보이는 단어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7세기 초 유몽인이 지은 <어우야담(於于野談)>이 그 시작입니다. 이때 야담은 주변에 도는 이야기부터 잡다한 지식, 그리고 당대 사람들의 관심사에 대한 이야기까지 총망라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쓰인 '어우야담' 일부

야담은 당대 사람들이 좋아했던 이야기입니다. 민담도 마찬가지지만 민담은 조금 더 형식화된 구전설화를 이야기한다면, 야담은 당대 사람들이 좋아했던 이야기를 다 모아놓은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야담은 역사적 사실, 인물등을 소재로 하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에 풍문이 더해지고 상상이 더해지면서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이 왜곡되기도 하고, 원래의 이야기와는 다른 방식으로 해석되어 전해지기도 하죠.

이건 기록된 ‘야담’이고, 단어를 그 자체로 해석해봅시다. 야담, 즉 들판에 떠도는 풍문이라는 뜻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다가 관심이 간 글을 아는 사람이 잡아서 기록해 놓은 것이 우리가 조금 전까지 이야기한 ‘야담’이라면, 현실에서의 야담은 공간성을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옆집 누가 그랬대, 건넛마을 누가 어쨌대, 같은 이야기들부터 시작해서 갖은 이야기들이 동네를 타고 돌면서 왜곡되고, 원래 사실이 어땠는지 알 수 없도록 바뀌었을 테고요.

야담과 '썰', '커뮤니티 게시물'은 소문과 닮았다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민담이 ‘썰’이라면, 야담은 ‘커뮤니티 게시글’과 비슷한 성격이 있습니다. 야담이 들판, 즉 어떤 ‘지역’을 타고 도는 이야기라면, 커뮤니티 게시글은 어떤 게시판, 특정 유저층, 집단, 또는 어떤 매체를 중심으로 퍼지는 이야기라는 말이죠.

* 야담처럼 시작한 웹툰

이런 류의 야담은 좁은 공간에서 내부자들끼리 소통될 때는 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유쾌하게 웃고, 떠들고, 내부 결속을 강하게 다지는 역할을 하죠. 조금 어렵게 표현해보자면 비균일한 인간군상이 균일한 집단으로 이루어지는 역할을 하는 게 이런 야담입니다. 개개인은 모두 개성을 가진, 다른 인간이지만 이들이 공유하는 이야기가 하나의 집단으로 묶어준다는 얘기죠. 지금도 ‘커뮤 감성’이라는 말로 통칭되는 어떤 감각을 생각해 보시면 이해가 빠를 겁니다. 커뮤니티별로 색깔이 있고, 그 ‘커뮤 색’은 게시글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게시글은 마치 야담처럼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없는, 글쓴이를 중심으로 사고한 결과물일 가능성이 높죠. 갖은 정보들이 섞이면서 믿을 수 없게 되고, 그 중에 재미있는 것이 조회수를 얻고 추천을 받게 됩니다.

따지고 보면 웹툰도 야담처럼 시작했습니다. 당시 작가들의 개인 홈페이지에서 커뮤니티로, 커뮤니티에서 포털사이트로, 포털사이트에서 플랫폼으로 발전했죠. 그래서 10여년 전에 “나는 웹툰 안 본다”하는 사람들도 <마음의 소리>는 본다고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마음의 소리>는 인터넷 사용자라는 집단을 하나로 묶어주는 하나의 도구였고, 개별 웹툰 작품과는 다르게 읽히던 시기가 있었으니까요. 문제는, 이 작은 커뮤니티가 커지면서 일종의 도시처럼 기능할 때 발생합니다. 야담은 마을, 들판 너머의 단위로 작동하는 법인데, 이제는 아파트 한 동이 마을에 살던 사람들을 모두 담게 되어 밀집도가 아주 높아지는 상황이 발생하는 거죠. ‘감성’의 공유가 불가능해지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겁니다.


옛날에는 동네 사람들이 모두 이름도 알고, 대충 뭐하는지도 알았는데 이제는 이름도 알 수 없고, 우리 얘기에 공감해주지도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상황. 오랫동안 웹툰이라는 마을에 머물렀던 사람들에겐 인구가 갑자기 늘어나면서 ‘우리 마을의 감성이 바뀌었다’는 불만이 나올 테고, 새롭게 이주해 와서 정착한 사람들에게는 오래된 관습이 불편하고 올드하게 느껴질 겁니다. 웹툰에서 나오는 불만과 아주 닮아 있습니다.

물론 오프라인 공간은 이런 과정을 겪으면 ‘힙함’을 잃고 사그라들게 마련입니다. 힙해서 흥했다가, 프랜차이즈가 주요 골목을 점령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밀려나는걸 젠트리피케이션이라고 부르는데, 웹툰에서는 젠트리피케이션보다 더 희한한 일이 일어나곤 합니다. 온라인 공간에선 오프라인처럼 ‘밀려 나는’게 아니라 사람들이 모이고, 중첩되고, 부딪힙니다. 이때 발생하는 것이 바로 커뮤니티 감성간의 충돌입니다.

* 이제 야담 너머가 필요하다

야담은 말 그대로 커뮤니티 감성을 담은 글과 같습니다. 작은 커뮤니티에서 모두가 동의할 땐 순기능이 크지만, 그것이 어떤 의견만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거나, 다른 의견을 적대하는 도구로 쓰일 때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세계 인터넷 문화, 아니, 인류 문화의 기반은 남성 중심이었습니다. 이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인터넷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웹툰 역시, 그 감성 자체는 2000년대 커뮤니티 감성을 담을 수밖에 없죠.

‘야담’이 그랬던 것처럼, 커뮤니티 게시글 역시 일종의 놀이 도구입니다. 고단한 현실을 잊기 위한 배출구이자, 들끓는 걱정과 고민을 해소하기 위한 창구, 주로 그저 현실과 고민을 잊고 왁자지껄 웃으면서 떠드는 장으로 기능했습니다. 그러니까 커뮤니티를 두고 유저들 스스로도 ‘별 의미 없는’ 것이라고 치부하곤 하는 거겠죠. 물론, 저 같은 사람에겐 의미가 있지만요.

하지만 야담은 웹툰과 다른 변화를 겪습니다. 야담으로 소비되고 치워지던 것들이 기록되고, 그 기록을 쓰는 사람의 주관이 들어가고, 고단한 현실을 잊기 위한 진통제로 일회성으로 소비하던 것에서 나아가 현실을 바꿀 수는 없을지 질문을 던지고, 카프카의 말을 빌리자면 얼어붙은 바다를 내리치는 도끼와 같은 역할을 하기를 기대하게 됩니다. 그저, 이야기일 뿐인데 말이죠. 야담이나 민담처럼 구전되던 이야기들은, 예술가들에 의해 소설과 같은 매체로 바뀌어 읽히고, 그들을 위대한 예술가로 불리도록 했습니다.

길거리에서만 봐도, 모든 사람이 스마트폰을 보고 있죠. 호놀룰루에서는 보행중 스마트폰을 금지하고 있을 정도로 언제, 어디서나 그렇습니다. (이미지 출처=CNN)

웹툰도 지금 이 기로에 서 있습니다. 문제는 인터넷 사용자가 적었던 00년대와 달리, 지금은 인터넷 사용자 = (거의)모든 인간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이 늘었고, 공간은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야담’의 생성지였던 웹툰에 대한 해석이 달라졌습니다. 웹툰이 연재되는 장 자체가 야담의 생성지라는 시각, 그리고 이제는 단순히 ‘야담과 같은 이야기를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영향력을 갖춘 만큼 그 너머로 가야 한다는 시각이죠.

챕터 제목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에디터는 그 너머를 보아야 한다는 시각입니다. 지금까지, 웹툰에선 야담, 즉 커뮤니티 게시글을 그대로 재현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만화적 과장을 더한) 재현은 재현이라는 것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현실을 바꾼다기보다 현실에 공감하는 일회성 진통제거나, 요즘 말로 하면 도파민 스위치가 될 수는 있겠죠. 물론 모든 작품이 그런 것이 아니고, 특정 작품 안에서도 연재하면서 이 역할이 바뀌기도 합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건, 웹툰을 ‘그것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다.

* 커뮤니티 속 ‘야담’의 재현과 플랫폼의 역할

저는 ‘커뮤니티의 해악을 재현하는’ 것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웹툰의 태생이 커뮤니티였고, 그 커뮤니티에서 시작한 만큼 커뮤니티가 변화하면서 그 재현 역시 같이 변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작가’의 품격에 대해서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만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만화가 그저 재현의 도구로만 사용된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건, 단순한 재현이 아닙니다. 관심을 받기 위해서, 또는 자조하기 위해서 들판에 소리치듯 풀어놓은 글이 재현되면서 인정을 받고, 자신에게는 발생하지 않은 피해가 마치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죠. 사실 여부와는 관계없이, 야담은 그렇게 야수처럼 사람들을 해치고 다닙니다. 혹시라도 그렇게 되지는 않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이 고민이 없이 그저 소위 ‘어그로’를 끌기 위한 작품을 만든다면, 그건 자기 생각을 더한 재해석을 붙일 능력도 없어 사람들을 ‘긁고’ 다니는 커뮤니티 분탕러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작가라면 그저 재현하는 게 아니라, 더 고민해야 합니다. 재현 자체가 의미가 있으려면 어떤 것으로 재현해야 할지, 그것도 아니라면 이 세상의 고통이나 사람들의 아픔을 재현을 통해 승화시킬지 고민해야 합니다. 고민하지 않고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다면, 그건 ‘좋은 작품’이라고 불릴 수 없을 겁니다.

‘그래도 독자들이 좋아하는데 어쩌라구요’, 라는 답변이 귀에 들리는 것 같네요. 맞습니다. 독자들이 원한다면 그걸 따라가는 것도 작가의 기쁨일 수 있죠. 그런데, 고민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은 분명히 들어야 할 겁니다. 창작의 고통이란 단순히 앉아서 오래 버티고 있어서 오는 것이 아니라, 편하게 가고 싶은 자신을 다잡으며 이야기하는 과정이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작품이 올라가는 플랫폼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커뮤니티별로 색채가 차이나는 이유는, 야담도 지역별로 나뉘는 이유는 그걸 구분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선 이런 얘기는 통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즉 ‘상식의 선’을 긋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마 요즘 ‘커뮤 감성’이라면 이런 얘기는 재미도 없고, 욕먹기 딱 좋을 겁니다. 그런데 플랫폼이 커지고, 사람들이 많아지고, 자기들끼리 왁자지껄 떠드는 마을이 아니라 도시가 되었다면 책임의 크기도 달라집니다. 너무 뻔한 얘기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재미도 없고, 당연한 좋은 얘기나 한다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근데 저는 써야겠는데, 어떡하죠?

* 그 너머로 가기 위한 품격

아까, ‘저자의 권위’가 사라져간다고 했습니다. 그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저자의 권위가 0으로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작가는 고민하는 사람이고, 고민해야 하는 직업이 작가입니다. 남들이 하기 싫은 일을 하는 직업은 존경받아 마땅합니다. 저는 만화가가 ‘커뮤니티 감성을 재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더 품격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말을 모아놓은 야담은 연구 대상일 뿐, 지금 다시 읽히는 고전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전래동화는 구전되어 지금까지 남았죠. 단순히 있었던 일을 재현하는데 멈추지 않고, 작가의 고민을 담은 작품은 예술이 됩니다. 타인의 고통을 끌어안고 고민한 한강은 노벨문학상을 받았죠. 만화에서도 이런 작품들을 선정합니다. 올해 ‘오늘의 우리만화’ 수상작 역시 그런 고민을 담은 작품들입니다.

저는 수많은 웹툰들 속에서 사람들의 삶을 바꿔놓을 시퀀스를, 제 삶에 남아있을 문장을, 그리고 때론 숭고한 자기희생이나 차마 삼키지 못하고 토해낸 작가의 고민을 읽었습니다. 단순히 커뮤니티 글의 재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작품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아마 여러분도 그러실 겁니다. 매체의 품격이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일본만화를 부러워할 때, 사실은 그 고민들을 부러워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떻게 현실의 문제를 이렇게 절묘하게, 또는 어떻게 완전히 가상세계인데 우리에게 의미가, 재미가 있을까? 하고 말이죠.

그렇게 생겨나는 품격이, 지루하고 쓸모없다고 느끼시나요?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만화를 잘 모르는 사람이 무시하면 기분이 나쁠 겁니다. ‘만화’라는 말이 무시당하는 것은 참을 수 없지만, ‘만화’와 품격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모순입니다. 만화에 대한 애정을, 왜곡하지 마세요.

예비작가들이 쉬운 선택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야담을, 커뮤니티에 떠도는 감성을 옮겨서 적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공모전에 출품하는 아마추어라 하더라도, 자기 작품이 어떻게 읽힐지를 고민하고, 그게 자연스러웠으면 좋겠습니다. 또, 자신이 다루는 것이 무엇인지 그냥 ‘분출’하는 것이 아니라면 좋겠습니다. 비단 작가만의 고민이 필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플랫폼도, 교육자도, 연구자도, 평론가도 모두 고민해야 하는 문제겠습니다. 또, 어려운 문제를 남기고 말았네요. 그럼, 다음 칼럼에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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