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카오루 내한 특집] 이토록 사실적인 아름다운 판타지 - 모리 카오루 만화의 세계

〈신부 이야기〉, 〈엠마〉 등으로 잘 알려진 작가, 모리 카오루가 처음으로 한국을 찾습니다. 모리 카오루의 독특한 필치와 장인정신, 그리고 환상을 그려낸 아름다운 세계는 독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SWI에서는 모리 카오루의 방한을 기념하여 ‘모리 카오루 내한 특집’을 준비했습니다. 모리 카오루의 대표작인 〈신부 이야기〉와 〈엠마〉, 그리고 모리 카오루라는 작가가 그려내는 세계의 이야기를 만나볼 시간입니다.​


모리 카오루 <엠마> 1권 표지. 이미지 제공 = 대원씨아이

​2002년 당시 ‘북박스’에서 출간된 <엠마>에서 모리 카오루 작가를 처음 알게 되었다. (북박스판이 절판되고 지금은 대원CI에서 다시 출간되었다.) 런던 거리를 배경으로 메이드 복장을 한 여자 주인공 엠마가 서 있는 표지의 <엠마> 1권이었다. 일본만화에서 메이드가 등장하는 만화가 꽤 있었지만 대부분 대상화된 존재였다. 모에의 대상으로 소비되는 경우가 많았다.

모리 카오루의 <엠마>는 표지만 보아도 성적 대상화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캐릭터는 특정 시대의 공간에서 구체성을 얻었다. 표지 이미지는 본문으로 이어졌다. 빅토리아 시대를 정교하게 재현한 섬세한 작화는 경이로웠고, 메인 테마인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 이야기는 안타까웠다. 이야기는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신흥 부르주아 계급의 장남 윌리엄 존스가 어린 시절 자신을 가르쳐주었던 가정 교사 켈리 부인을 방문해 메이드 엠마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두 사람 모두 첫 만남에서 상대방에 대한 호감을 갖게 된다. 1권을 시작으로 작품이 한국에 출판될 때마다 후속권을 따라갔다.

신분을 뛰어넘은 사랑 이야기는 두 길을 갈 수 있다. 멜로에서는 사랑하지만 신분 차이가 주는 시련으로 여성 주인공이 고통받고, 독자들은 그녀를 연민한다. 로맨스는 시련이 있어도 사랑이 결실을 맺는다. 독자들은 주인공들의 사랑을 자기 사랑으로 받아들인다. <엠마>는 끝내 안타까운 낭만적 파토스를 선택하는 것 같았다. 두 사람 모두 서로를 사랑하지만 고백하지 못하는 건 물론이고 엠마는 미국으로 떠나라는 괴한의 협박을 받아들인다. 엠마의 어려웠던 과거, 자신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 상대방에 대한 사려 깊음을 함께 확인한 독자는 사랑을 이루지 못한 엠마를 동정하게 된다. 멜로적 감상을 불러내는 이야기 구성이다. 하지만 벤 싱어가 <멜로드라마와 모더니티>1에서 지적한 멜로드라마의 다섯 가지 핵심 구성요소인 강렬한 파토스, 과장된 감상성, 도덕적 양극화, 비고전적 내러티브, 그리고 스펙터클 효과를 찾기 힘들다.


*멜로의 조건을 갖췄으나 멜로가 아닌

<엠마>에서 강렬한 파토스의 표현이나 과장된 감정선을 움직이는 절박함은 절제된다. 엠마와 윌리엄이 처음 만났을 때, 켈리 부인이 알아차릴 정도로 서로에 대한 감정이 움직이지만 이야기 내내 감정은 절제된다. 심지어 윌리엄에게 자신의 딸과의 파혼을 요구당하자 망신당했다 생각한 캠벨 자작이 괴한을 보내 엠마를 납치하는 ‘최악의 사태’ 편에도 엠마는 담담한 감정으로 상황을 받아들이고, 윌리엄은 엠마를 찾아 미국으로 떠나면서 연민이 아닌 사랑의 성취에 도달한다. 구태여 구분하자면 캠벨 자작 정도가 악역이겠지만, 신흥 자본의 등장에 점점 밀리는 귀족의 자존심은 허세처럼 보인다. 그러니 도덕적 양극화도 찾기 어렵다. 우연적 일치나 믿기 어려운 일이 느닷없이 등장하는 비논리적인 내러티브 구조도 찾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멜로 특유의 스릴이나 폭력이 동반되는 선정적 스펙터클 역시 없다. 시대 배경도 메이드와 부자 도련님의 사랑이라는 테마도 모두 멜로적 감상으로 연결될 것 같지만 오히려 <엠마>는 격정적 감정을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연결되는 연출로 눌러 놓는다. 미국에 있는 엠마를 찾아온 윌리엄을 발견하고 도망치는 엠마를 좇아가는 시퀀스를 보자. <엠마> 전체에서 가장 격정적이고 역동적인 시퀀스다. 엠마는 나뭇 가지에 부딪쳐 안경이 깨지고, 윌리엄은 얼굴에 상처가 난다. 그래도 과장된 동세보다 슬로우모션처럼 컷을 연결한다.

모에와 멜로를 넘어 <엠마>는 빅토리아 시대에서 배우고, 성장하고, 타인을 배려하며 동시에 자신의 직업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 ‘엠마’를 보여준다. 꼼꼼하게 옷을 챙겨입고, 머리를 올리는 과정을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아무 대사 없이 보여주는 시퀀스에서는 장엄한 숭고미도 느끼게 된다. 모에화되어 소비되는 허상의 캬라에 가까운 메이드가 캐릭터 엠마로 고유성을 갖게 된 것이다. 엠마가 보여주는 고유성의 렌즈를 통해 빅토리아 시대 메이드의 노동을 보게 되고, 사교계의 분위기를 이해하게 된다. 이렇게 정리해도 여전히 <엠마>의 힘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엠마의 고유성을 만들어내는 힘의 원천은 모리 카오루가 어느 매체보다 정교하게 재현한 빅토리아 시대의 패션, 건축, 거리에 있다. 수작업을 통해 재현한 19세기 영국은 섬세한 부분까지 고증을 통해 복원되었다. 심지어 윌리엄의 친구이자 인도의 왕족인 하킴을 통해 당시 자본가 계급이 몰입했던 동방의 이국 취미까지 섬세하게 재현한다. 산업혁명 이후 새로운 재료와 기술을 기반으로 등장한 원기능주의와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 축적한 막대한 부를 기반으로 그리스로마 양식이나 중세 고딕, 동방의 이국적 위향까지 혼합한 역사주의의 대립처럼 혼란한 시대2를 칸 안에 드러낸다. 이러한 시대상은 모리 카오루 만화의 차별화 요소이고, 출발점이다.


*횡단하는 ‘캬라’가 아닌 고유성을 지닌 ‘캐릭터’

<엠마>에서 영국 신사와 숙녀들의 격식을 갖춘 복식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모리 카오루의 작화력은 경이로웠다. 그러다 보니 모리 카오루는 빅토리아 시대를 사실적으로 재현한 작가로 쉽게 규정되었다. 하지만 후속작 <신부 이야기>에서 중앙아시아로 공간을 옮겨버렸을 때 독자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풍광과 전혀 다른 중앙아시아의 풍광도 압도적인 필력으로 완벽하게 재현했기 때문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다양한 패션에 몰입했던 작가가 후속작에서 공간을 뛰어넘어 중앙아시아로 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공간이 주는 사실성 위에 움직이는 캐릭터들이다. ‘캬라(キャラ)’가 아닌 ‘캐릭터(キャラクター, character)’의 힘, 그 고유성 말이다.

이토 고는 자신의 저서 <데즈카 이즈 데드>에서 캐릭터 개념을 정교하게 다듬어 캬라와 캐릭터를 구분한다. ‘캬라’는 기호적이고 보편성을 갖는다. 일본 만화와 게임에 나오는 ‘메이드’는 ‘캬라’다. ‘캬라’는 원본 텍스트에서 쉽게 이탈할 수 있어서 넓은 ‘횡단성’을 갖는다. 일본만화와 게임에서 ‘캬라’화된 메이드는 메이드 카페 등으로 확장된다. 구체적 고유성보다는 이미지가 활용된다. 반면, <엠마>에 나오는 엠마를 비롯한 여러 메이드들은 ‘캐릭터’다. <엠마>의 스토리텔링 안에서 고유성을 지닌 삶으로 존재한다. 이를 이토 고는 “텍스트의 배후에 그 ‘인생’이나 ‘생활’을 상상하게 하는 것3” 이라 설명한다.


모리 카오루 <신부이야기> 11권 표지. 이미지 제공 = 대원씨아이

<신부 이야기>는 중앙아시아 초원이 배경이다. <엠마>, <신부 이야기> 모두 19세기 후반이 배경이다. 지금은 평온하지만 이후 분쟁과 전쟁 등이 벌어질 시대이다. 시대는 같으나 공간이 달라졌다. <신부 이야기>의 배경인 중앙아시아는 영국보다 더 전통에서 오는 제약이 강하다. 유목민의 삶을 사는 하르갈 가의 딸 아미르는 스무 살에 정착촌을 이루고 사는 에이혼 가의 열두 살 아들 카르르크에게 시집온다. 아미르는 유목민족의 딸답게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에도 능숙하고, 자수도 잘 놓는다. 1권 후기 만화에 작가의 설명을 그대로 인용하면, 명궁, 연상의 아내, 뭐든지 해체, 야성, 순진, 강하다, 하지만 청순, 하지만 양갓집 아씨다. 여덟 살 어린 남편과 살며 모든 노동을 척척해 내는 모습은 메이드 ‘엠마’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다. 중앙아시아 민족들의 다양한 복식이나 말이나 낙타 같은 동물들의 재현도 감탄을 자아낸다. <신부 이야기>는 첫 번째로 등장한 신부 아미르 이야기를 시작으로 다른 부족의 여러 신부 이야기를 풀어가는 옴니버스 구성을 보여 준다. <신부 이야기>도 <엠마>처럼 시공간을 시각적으로 완벽하게 재현하고 그 위에 캐릭터를 놓는다. 아미르를 비롯해 여러 ‘신부’ 캐릭터들도 전통과 시대가 주는 제약에도 굴하지 않고 스스로 노동의 가치와 아름다움과 힘을 드러낸다. 중앙아시아 여러 민족의 전통 속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노동을 하고, 함께 도우며 살아간다.

모리 카오루는 19세기 대도시 런던과 여전히 전통적 양식을 지키고 있던 중앙아시아 초원이라는 상반된 공간에서 여성의 삶을 보여 준다. 그들의 삶은 연민의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행동하고, 필요하면 연대하는 주체적인 삶이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의지하고, 연인에게 서로 기대며, 멘토를 만나 지혜와 위로를 받는다. 읽다 보면 여기의 삶은 19세기 영국과 중앙아시아가 아니라 아주 사실적인 판타지의 세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 정도다. 우리 삶의 구질함이 모리 카오루의 세계 안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사실적으로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약간의 탈색쯤이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

  1. ​벤 싱어, 이위정 옮김(2009), "멜로드라마와 모더니티", 문학동네, p.73-81.
  2. 최범(2018),"최범의 서양 디자인사", 안그라픽스, p.42-45.
  3. 伊藤剛(2005), "テヅカ.イズ.デッド : ひらかれたマンガ表現論へ", NTT出版, p.97.

연관 기사
추천 기사
인기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