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와 네팔, 그리고 프랑스와 페루 시위에선 '밀짚모자 해적단' 깃발이 시위의 상징이다


인도네시아 시위에 사용된 원피스 깃발 (출처: 트리뷴 자바)

⟨원피스⟩가 인도네시아, 네팔, 필리핀 등 동남아 지역 반정부 시위는 물론 프랑스, 페루, 마다가스카 등의 시위에서도 등장했습니다. 시위의 계기는 모두 다르지만, ⟨원피스⟩​의 밀짚모자 해적단 깃발이 전면에 등장한건데요. 루피가 세계정부에 맞서 싸우며 위대한 항로를 항해하는 모습이 자유의 상징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처음으로 등장한 해적기는 7월 인도네시아 시위에서였는데, 프라보워 수비안토 대통령이 독립기념일 국기 게양을 강요하자 권위주의 정부에 대한 반발이 일었고, 이와 동시에 국회의원의 고액 급여, 주택수당 지급 사실이 알려지면서 시민들이 분노했습니다. 일반 시민들이 벌기 힘든 수준의 고액을 받는다는 점이 시위의 기폭제가 됐고, 여기에 루피의 밀짚모자 해적단 깃발이 등장한겁니다.

이후 네팔에서는 정부의 부패와 기득권층 자녀들, 이른바 '네포 키즈'의 세습에 대한 분노가 시위로 이어졌는데, 정부가 소셜미디어 금지로 대응했다가 시위 규모가 커졌죠. 프랑스와 마다가스카 반정부 시위에서도 밀짚모자 해적단 깃발이 나타났습니다. 이 시위들은 모두 불공정한 시스템, 즉 부패한 정부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시위였다는 점이 공통점입니다. 루피의 밀짚모자 해적단 깃발 역시 천룡인은 물론 세계정부와 대결을 벌이는 루피의 이야기가 자신들의 투쟁과 겹쳐져 있다고 인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원피스⟩​는 전세계적으로 5억 1천만부 이상이 팔린 메가히트작으로, 거의 대부분이 한번쯤 들어본 작품이라는 점도 주효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OTT를 통해 애니메이션으로 접한 사람들도 적지 않을텐데요. 깃발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폭넓은 문화코드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또 정치에 관여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도 ⟨원피스⟩​​가 눈에 띄면 이를 자신에게 가까운 사건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되고, 정치적 편파 논란에서 자유롭다는 점이 Z세대의 시위에 ⟨원피스⟩​​가 등장한 이유로 분석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시위에서 응원봉이 등장한 것처럼, 만화에 등장하는 해적 깃발을 반대하기는 어렵다는 거죠. 특히 정부에서 검열이나 규제하기에 이미 유통되고 있는 만화의 깃발을 금지할수는 없다는 점도 주효했다는 분석입니다.

2013년 홍콩 시위에서 상징으로 사용된 ⟨진격의 거인⟩의 초대형 거인
그러니까, 노동조합 깃발처럼 '그들의 리그'라고 받아들여지는 게 아니라 '우리의 일'로 받아들이게 되는 효과를 만화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겁니다. 실제로 2013년 홍콩 민주화 시위에서는 2013년 7월 1일 '홍콩 반환일'을 기념해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는데, 여기서 중국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진격의 거인⟩의 초거대 거인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벽 안의 사람들을 홍콩에, 벽 밖의 침략자를 중국에 비유한 거죠. 이후 2015년 중국 정부는 폭력성을 이유로 ⟨진격의 거인⟩을 비롯한 일본 애니메이션 상영을 중지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2011년 칠레 시위에서는 '원기옥' 퍼포먼스가 등장하기도 했는데, 보통 사람들의 힘을 모아 가장 강력한 기술을 사용한다는 원기옥의 이미지가 시위에 딱 맞아 떨어진 겁니다.

각 세대가 공유하는 문화가 저항의 전면에 드러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동안 주로 이건 음악의 역할이었습니다. 1960년대 이후 락밴드를 비롯한 저항정신의 상징과도 같았던 락의 시대가 가고, 이제 파편화된 시대에 '통합'을 만들어내는 것이 취향으로 감상하는 만화라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한국은 KPOP이 중심에 있었다면, 동남아시아를 필두로 한 글로벌 시대정신은 애니메이션, 게임 등이 이뤄내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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