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뾰로롱 제작기] 잡지를 처음 시작하는 마음으로
나는 일기장을 한 번도 처음부터 끝까지 사용해 본 적이 없다. 다이어리도 마찬가지다. 어떤 기록물이든 처음 그것을 마음먹었을 때와는 달리 몇 번 끄적이고 나면 대부분 크게 유의미하지 않은 동일한 내용들이 반복된다는 사실을 깨달아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하다 말아버리는’ 것은 미성숙할 때의 습관적인 행동이며, 성숙된 이후에는 무엇이든지 낙장불입인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어렴풋이 기대했다. 성인이 된 지도 어언 6년째인 지금, 새삼스레 되돌아보면 굳이 멀리 내다보지 않아도 발밑은 거두어들인 장들 투성이다. 낭패다! 해왔던 일들은 많지만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 기분이었다. 어떤 것을 기록해야 하고 어떤 것이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인지 도통 종잡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만화가가 된 데에는 나도 모르는 뾰족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본인의 작품에 흥미나 재미를 느끼지 못하면서도 매번 마지막 장을 그려냈고 마감 시간에 늦지 않게 제본에 성공해서 지금까지 여러 권 출판하기도 했다. 어릴 적 처음으로 만화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이후로 한 번도 믿음에 흔들림 없이 미술 입시 제도 안에서 길을 걸어왔기에 지금에 와서는 거의 관성의 힘으로 버티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는 뚜렷했으니 독립만화 시장에 뛰어들었다. 당장 생각나는 이야기들을 풀어가다 보면 고유한 스타일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내 만화를 읽는 사람들은 작가의 마음이 뭔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이것은 어쩌면 함께 긴 시간을 보내는 만화 전문가 어르신들의 의견으로 편향된 데이터일지도 모른다.)
그에 비해 다른 사람들이 그리는 만화는 분하게도 재미있었다. 뭐 독립만화라면 다 그런 것 아닌가? 하지만 내 이야기는 왜 굳이 무언가로부터 독립하려 했는가? 건설적인 생각으로 독립하고자 하는 게 아니고 재미있을 의무로부터 도망치고자 했던 건 아닌가? 기록될 가치가 있나? 그런 생각이 드니 더는 견딜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잡지를 만들자는 제안을 받았고 샛길을 발견한 마음으로 그러자는 대답을 보냈다.
내게 잡지를 처음 시작하는 마음은 비겁한 마음이었다. 꿋꿋이 주관을 관철할 의무에서 벗어나서, 무엇인가 타인에게도 가치있을 수밖에 없는 객관적 시야를 직조하고자 하는 마음. 더 이상 비난받기 싫어 다시 또 도망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지금을 견디지 못해서 객지를 향해 도망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가? 잡지를 만들면서부터는 오히려 객관이라고 믿었던 것들의 근본을 파내려가니 눈부신 진리로 빛나는 다이아몬드 대신 수많은 비난의 풍파를 직격으로 맞은 합의의 바윗덩이를 발견하는 일이 더 잦았다. 이것 또한 남들에게 보란 듯이 들어올리기엔 부족하다. 과연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이고 무엇이 아닐까? 말 그대로 답은 없었기에 더 답답했다. 결국 내보이기 위해서는 내가 직접 정을 들어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명징한 수치로 정의할 수 없고, 수없이 많은 주관들이 힘겨루기를 하다 찾은 무게중심이 겨우 상식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 같은 물성 안에서 ‘남들이 이렇게 봐줬으면 좋겠다’ 싶은 부분을 다듬는 것은 만화나 잡지나, 그림이나 글이나 마찬가지다. 정답 없이 수많은 의문의 사이를 생존하면서 모양을 내는 일. 도량형과 통하는 규격의 결과가 나오면 호응받고 아니면 쓸모가 적어질 뿐이다. 인간성을 가진 생물이라면 대부분이 동의할 당연한 상식의 원석은 오히려 손상시킬 수 없기에 조각의 선택지가 현저히 적기도 했다. 그러다 주변을 둘러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바닥에 주저앉아 나와 같은 작업을 하고 있었다. 모든 이야기와 그가 담고 있는 가치는 돌이다! 아무 데나 굴러다니지만 인고와 고뇌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쉽사리 도달하지 못하는 곳에서 이성과 사고를 이용해 찾은 객관적인 보석들을 정갈히 보여주고 싶었던 마음이었는데 오히려 남들이 보기엔 폐허인 이 곳이 왜 우리에겐 유적이고 보존 가치가 있는지 설명하고 있게 되었다. 지금은 이왕이면 더 이상하고 모나고 못 생긴 돌들까지 다 데려와서 이 모양은 어떤 결과로 탄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감상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이 현장은 사실 대단할 것도 없고 그 속에선 가끔 내가 조각한, 의도를 파악할 수 없는 돌도 발견될 것이다. 모든 작품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들은 모두 큰 범위에서 모종의 이유로 떨어져 나온 조각들이라는 것이다. 당연하게 발 딛고 서 있는 대지와 똑같은 구성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어떤 모양을 하고 있든 어떠한 경위든 단일하고 거대한 집단만 존재하는 것보다는 여러 현상과 상호작용한 결과로서의 소집단이 대량 존재하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럽다. 에너지의 균형과 재분배를 위해서, 수없이 많은 계기의 독립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필요성에 대한 논의는 규격 외다.
돌밭은 생각보다 넓다. 우리가 미처 발걸음하지 못했던 구석들까지 누군가는 닿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모든 역사는 흔적이므로 시공을 초월하는 의지가 가치를 가려 주지 않을 뿐. 글과 그림으로 다듬어지기 시작한 지금 내 눈앞의 바위를 마주하고서 드디어 힘 주어 한 번 크게 내리찍기 시작한다.
깡!
202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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