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뿅] N잡 일기 1: 최고의 설득은 설득할 필요가 없는 것
‘뿅’은 뾰로롱의 자체 콘텐츠 중 하나로, 이름처럼 비교적 짧은 이야기들을 담는다. 앞으로, ‘뿅’에는 주 1회 주기로, 멤버들의 생동감 있는 문장들로 뾰로롱을 만드는 과정이나 관련 후기, 일지 등이 업로드될 예정이다. 뿅 코너의 두 번째 글은 뾰로롱의 기획자이자 독립만화가로 활동 중인 INDEX 작가가 여러 직종의 업무를 겪으며 남기는 이야기가 될 예정이다.
내가 독립만화라는 생소한 시장에 발을 들이고 나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5년이 지나고 있다. 처음에는 작품만 하면서 지낼 생각이었는데 어째 몸담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만화제작 뿐만 아니라 상업 일러스트 제작, 잡지 기획, 행사 기획, 팟캐스트 기획과 창작팀 매니지먼트, 교육용역 제공 등 하는 일의 가짓수가 점점 많아지고 있는 것 같다. 그래도 먹고 사는 문제는 아직 험난하기만 하다. 언젠가는 이 모든 ‘커리어‘들을 제대로 된 시장에서 발휘할 수 있을까?
사회초년생 시절에는 누구나 불안정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누구나 겪는 등용문인 취준의 벽을 통과하기만 하면 남들처럼 살아갈 수 있다는 게 한국의 지배적인 정서 중 하나다. 예술가도 예외는 아니다. 좋은 학교 나와서 안정적인 회사나 에이전시에 들어갈 수 있다면 적어도 먹고살 걱정은 덜 수 있을 것 같다. 누구나 ‘난 당연히 정규직의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한다. 프리랜서의 삶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어느 순간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만을 하면서는 먹고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그때부터 한 가지 선택지밖에 없던 삶에 갈림길이 등장한다. 자본과 하고싶은 것 중 무엇을 우선적으로 고려할 것인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이미 닦아진 길 이외의 방향으로 벗어날 결심을 한 순간, 그 선택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내 노동의 가치를 설득하는 방법을 깨우쳐야만 한다. 그것도 외주 작가가 아닌 독립만화를 선택한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면 설득은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가장 쉽고도 어려운 방법으로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이 있다. 작가로서의 주관을 다듬고 강철을 제련하듯 수많은 테크닉 훈련을 통해서 만듦새도, 메세지도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 작품의 사양을 연구하고 적절히 타협해서 괜찮은 단가로 그것을 구입하게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이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띌 수 있도록 적절한 장소에 홍보하거나 연계한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것 또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만화가의 본분에 충실하는 것이다. 작품을 한다면 누구나 목표하고 있는 사항이기도 하다. 이런 방법으로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면, 오로지 돈만을 위해 하고 있는 아르바이트나 부업을 그만두고 내 작품과, 그에 관련된 일만을 하면서 삶을 부양할 수 있을까?
작품만으로 독자들을 설득해 충분히 먹고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에 성공하더라도 현재 우리가 닦고 있는 길 위에 있는 사람들은 충분한 내수를 보장할 수 없다. 지금 하고 싶은 만화를 하는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내게 주어진 무대 위에서 좋은 작품을 선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이 무대를 더 넓히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추가로 유입될 수 있도록 지형을 설계하는 것이다. 이 분야에서 저 분야로 환승할 수 있는 플랫폼과 충분히 많은 수요층을 유입할 수 있도록 하는 오프라인 행사, 지속적인 시장의 존속을 위한 교육 등. 자본주의 국가에서 하고 싶은 예술로 먹고 살려면 큰 틀에서부터의 ‘당연한 것’들이 필요하다. 의무교육을 받으며 딱히 의문을 가지지 않았던 초-중-고-대 교육의 시스템처럼 당연하게 작품을 그리고, 교류하고, 접할 수 있는 잘 닦인 선로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업적을 달성하려면 개인의 힘으로는 요원하다.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작가들의 작품, 또는 성향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 시장의 지속 가능성이 보이는 지금이야말로 조직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다.
자연스레 예전부터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당연함에서 벗어나, 내 의지로 독립창작의 영역으로 걸어나와 탈시스템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다른 순환을 만들고, 시스템을 구조하며 설계하는 일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있게 되었다. 잡지를 만드는 일도, 만화사의 팟캐스트를 진행하는 일도, 만화 관련 행사를 기획하는 일도 이 길을 조금 더 잘 닦고 싶어서 시작했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많은 방향성으로 설득할 수 있는 집단적 수단의 일환으로. 그리고 좀 더 큰 차원에서의 순환을 그리는 팀들이 점점 더 많이 발생할수록 독립만화 시스템도 함께 견고해질 것이다. 어쩌면 언젠가는 본인의 작품만으로 설득력을 갖추어 먹고살 수 있는 날이 올 지도 모른다.
독립시장이란 무릇 충분해지면 더 이상 독립이라 부를 수 없는 모순을 안고 가야만 하는 것 같다. 시스템이 당연해질 정도로 커지면 소수가치를 추구하기 어렵지만 모든 것에서부터 독립하려 고립만을 선택하다 보면 설득력이 없어지는 일이 일어난다. 설득이라 함은 비단 작품으로 독자를 이해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한 주체의 선택에 관여하는 모든 외부적 요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내가 선택한 설득의 방법은 설득의 필요를 없애는 것이다. 갖가지 수단을 통해서 독립만화가 누구에게나 당연해졌으면 좋겠다. 하고싶은 만화를 선택한 삶도 이어질 수 있도록. ‘충분히 커지고 자동화된 지금 시장이 독립만화라고 불릴 수 있는가?’ 라는 논의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그리고 다시 누군가가 이 당연함의 길을 벗어나서 새로운 영역으로의 확장을 도모하는 순간, 이리저리 연결된 선로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땅은 더 넓어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