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만화 입문기] 디자이너, 독립만화에 입문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필자는 한동안 대부분의 날을 무기력하게 보냈다. 개인적인 일들이 이어지면서 미래의 무언가를 기대하고 싶다는 마음의 동력이 꺼진 상태였다. 무기력의 늪에 빠져 있을 때 열정적인 사람들을 보는 건 살짝 심술이 나기도 하고 호기심이 들기도 하는 광경이다. 무엇이 그들을 저토록 움직이게 만드는 걸까?
바로 그런 시기에 『뾰로롱』 편집장님의 지인으로서 캘린더에 하고싶은 만화전 일정을 적어 두었다. 그리고 며칠 후, 그의 진심에 이끌려 거짓말처럼 뾰로롱에 디자이너로 합류하게 되었다. 독립만화 세상의 한복판에 던져진 후 비로소 독립만화에 입문하게 되었으니, 일종의 독립만화 수저를 물게 된 셈이다.
하지만 독립만화라는 새로운 세상이 등장했다고 해서 갑자기 삶의 의욕이나 열정이 솟구친 건 아니다. 그래도 그동안 정말 다행히도 많은 분이 땀 흘려 만들어 주신 만화 행사를 관람하며 필자처럼 게으른 뉴비도 정말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입문할 수 있었다. 좋은 세상이다. 열정적인 세상이다. 사실 입문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게, 작품 하나를 소장해서 진득하게 읽어 본 적도 없거니와 내가 지금까지 경험한 독립만화는 행사장에서 눈치를 보며 한 책당 길게는 10분 정도 살펴본 것이 전부다. 그래도 초심자의 관점에서 최근 개최된 ‘하고싶은 만화전(이하 하만전)’과 ‘칸새’의 풍경을 그려 보겠다.
처음 찾아갔던 하만전의 풍경은 의외로 익숙했다. 일러스트 페어를 상상하며 시원한 행사장에 들어섰다. 부스의 형태는 페어와 비슷했지만, 작가님들께서 직접 자리를 지키며 책의 내용을 적극적으로 설명해 주고 계셨던 것이 눈에 띄는 차이였다. 부스에 도착하자마자 망설임 없이 책을 구매하는 분들이 계셨던 것도. 아마도.. 작가님들의 팬이신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스를 돌며 책들을 조심스럽게 구경했다. 관람하면서는 개인적으로 진(Zine)을 많이 떠올렸고 독립 출판물이라는 점에서 많은 것들이 비슷했던 듯하다. 앞 페이지에 책 번호가 수기로 적혀 있는 얇은 책부터 직접 구멍을 뚫고 찢는 등의 손길이 묻어 있는 만화책들은 정말 독립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했다. 뚝딱뚝딱 직접 만들어지는 이 많은 출판물.. 모두가 바빠 보였고, 확신이 있어 보였다. 그곳에 비치된 책을 펼치는 것조차 한정된 재고를 하나 소진하고 있다는 마음에 미안해지는 것이었다.
이후 다녀온 칸새는 또 다른 감흥을 주었다. 많은 사람이 이른 시간부터 행사장 입구에 줄서 있었다. 정말 예쁜 굿즈들과 쾌적한 공간.. 슬러시와 예쁜 구매 용지.. 그 구매 용지에 정성껏 책 제목을 쓰고 있는 사람들.. 관람객이 정말 많았고, 위탁 판매도 진행되고 있었다. 그곳을 경험하니 사실 생각보다 그렇게 독립적이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독립이라 하면 고개를 푹 숙인 사람들이 짧은 말로 소통할 것 같다고 지레짐작했기 때문이다. 행사가 끝나고 독립만화에 대해 생각하면서 독립만화 도서관이 있다면 어떨지 생각했다. 그러고서 뒤늦게 깨달았다. 나처럼 지갑이 얇고 작품을 다 살 수 없는 입문자에게, 수많은 독립만화를 한 자리에서 ‘읽을’ 수 있는 이런 행사는 귀하고 절실하다는 것을. 나같은 사람의 니즈를 정확히 반영해 준 고마운 공간이었단 걸 알았다. 아쉬워졌다. 다음 행사를 기대하며..
독립만화라는 단어를 머리속에서 빙빙 돌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독립만화의 기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지금까지 접했던 모든 만화들 중에서 좀 마이너해 보였던 모든 것들이 떠올랐다. 인터넷 세상을 오가며 짧은 만화든, 긴 만화든, 합법적으로든, 불법적으로든 찍먹하던 사람에게는 그저 만화였을 뿐인데.. 어떤 것이 독립만화였고 어떤 것이 아니었을까? ‘거대 자본을 거치지 않고 개인이 모든 것을 결정한 만화’. 그렇다면 내가 트위터에서 보던 짧은 만화들이 곧 독립만화였겠구나. 그렇다면 인스타 일상툰도? 문득 『고향최고』에서의 “뭔가 재미있는 일 없으려나…” 패널이 떠오른다. 솔직히 나는 그것이 그저 개인이 만든 짤방인 줄로만 알았다. 개인이 만든 것은 맞지만 사실은 그 패널 이전과 이후로 수많은 장면들이 이어진 ‘만화’였던 것이다. 문득 독립만화라는 단어에 대한 논쟁도 분명히 존재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뉴비의 입장에서는, 다양한 분들께서 마련해 주신 친절한 행사들 덕에 생각보다 그렇게 큰 진입장벽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리고 기존에 보던 만화와도 큰 차이를 느끼진 못했다! 만화의 형식을 일상적으로 접해 오다 보니. 하지만 이쯤에서 고백하자면 나는 아직도 어떤 만화를 보고 팬이 되어 본 적은 없다. 작품의 거대한 서사라던지 작가가 강렬하게 호소하는 메시지에 여전히 잘 이입하지 못한다. 작가의 감정에 공명하기보다는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군, 재미있군, 그림체도 예쁘군 정도의 건조한 관찰에 머무는 것이다. 사실 취향에 맞는 그림을 우선으로 보게 되는 것도 있다. 내가 어떤 작가님의 열혈 팬이 될 수 있을까? 이 넓은 세상에 나의 소울메이트가 만든 만화가 있을까? 그걸 목표로 삼는 것 또한 입문자를 위한 tip이겠다.
하지만 하만전, 칸새 그리고 그곳에서 관찰한 수많은 작가님과 그들의 원고, 그들의 생활을 직접 목격하면서 든 감정은 그렇게 건조하진 않았다. 완성된 그림을 보면 그저 ‘응 그림이 있군, 그림이군’ 싶지만, 제작 과정 영상을 보면 이렇게 많은 레이어가 있었다고!? 싶은 것처럼 말이다. 그들의 고민과 열정이 와닿았던 듯하다. 이 사람들은 왜 이걸 하고 있을지가 궁금하다. 당신이 이걸 넣은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어떻게 이걸 만들었는지를 덩달아 캐묻고 싶어진다. 이 세계는 무엇으로 작동할까. 이 사람들은 어떤 의도로 힘들게 작품을 만들까. 그런 모드로 독립만화계에 다가가고 있는 입문자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만화 현장에서 이 사람들의 소중한 열정을 관찰하며 나 또한 내 안의 동력을 찾을 수 있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