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민장미’의 탄생은 ‘최초’의 천계영이 있어서야

※ 이 글은 천계영 작가의 웹툰 <좋아하면 울리는>과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한 연애 프로그램 좋아하면 울리는 짝!!!’에 대한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천계영 작가의 웹툰 <좋아하면 울리는>을 원작으로 한 연애 프로그램 ‘좋아하면 울리는 짝!짝!짝!(이하 짝짝짝)’이 종영했습니다. 웨이브에서 지난 12월부터 올해 2월까지 총 13화가 방영된 이 프로그램은 범람하는 짝짓기 프로그램의 홍수 속에서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다가 후반부인 9~10화즈음부터 반응이 터지기 시작했는데요. 바로 여성 출연자인 ‘자스민’이 또다른 여성 출연자인 ‘백장미’를 이전부터 좋아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부터였습니다. 자스민의 데이트 신청에 백장미가 호화 데이트 코스로 화답하면서, ‘스민장미’가 최종 커플이 되어 연애 프로그램 사상 최초로 여x여 커플이 탄생할지에 이목이 집중되었습니다.

자스민은 결국 다른 남자출연자와 이어지고, 자스민이 백장미에게 고백하면서 울었던 장면이 사실은 남자 출연자에 대한 마음을 굳히겠단 얘기를 하며 운 장면이었다는 것이 최종화에서야 밝혀지면서 ‘짝짝짝’은 퀴어베이팅(*퀴어적인 표현을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묘사하거나 보여주지 않는 것) 논란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환승연애’, ‘솔로지옥’ 등의 히트 후 연애 프로그램이 셀 수 없이 쏟아지고 있지만 모두 이성애 관계만을 공고히하는 와중에 여x여 커플이 조명되었다는 점, 동성을 좋아할 수도 있다는 게 연애 프로그램에서 자연스럽게 비춰지는 점, 바이섹슈얼(양성애자)인 여성 성소수자의 모습이 가시화된 점 등을 고려하면 ‘짝짝짝’은 분명히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짝짝짝’이 천계영의 웹툰 <좋아하면 울리는>을 원작으로 하고, 그 원작을 존중한 예능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천계영이 있었기에 ‘스민장미’가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동성을 골라도 상관 없는 거잖아'라고 답한 자스민에게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로 되물은 '니...LGBT가?'는 트위터의 실시간 트렌드에 오르면서 밈이 되었다.


'최초'의 천계영

천계영은 데뷔한지 20년이 넘었지만 언제나 도전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는 작가였습니다. 천계영은 데뷔부터 남달랐습니다. 잡지 《윙크》의 신인 만화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그는 다른 만화가들이 종이 원고지에 잉크펜으로 그리고 스크린톤을 붙이던 시절, 포토샵으로 완성한 원고를 외장하드로 제출했습니다. 실제로 부천만화박물관에서 만화가들의 펜을 기증받을 때 다른 작가들은 G펜이나 스푼펜 등을 내놓았지만 천계영은 마우스를 제출했습니다.

‘만화가 =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는 편견을 깬 것도 천계영입니다. 천계영은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연재한 <DVD> 때부터 이미 3D 모델링 프로그램을 활용해 만화를 그렸습니다. 이어 차기작인 <하이힐을 신은 소녀>를 연재할 때는 배경은 물론 캐릭터들까지 3ds Max를 이용해 원고를 완성했습니다. 이제 ‘스케치업’ 같은 3D 프로그램을 활용해 배경을 완성하는 일은 흔하지만 여전히 캐릭터는 직접 그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고려하면, 캐릭터마저 3D 프로그램으로 구현하는 천계영 작가의 작업방식은 가히 독보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Cinema 4D를 독학해 2014년 연재를 시작한 <좋아하면 울리는>에서는 스크롤 방식의 웹툰 연출에 완전히 적응했음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3D 프로그램을 이용해 완성한 <하이힐을 신은 소녀> 표지 작업 과정 (출처 : 중앙일보)

2018년, 천계영 작가는 악성 종양 제거 수술을 받고 손가락에 퇴행성 관절염이 찾아오면서 마우스를 클릭하는 것조차 어려워졌습니다. ‘펜’을 쥘 수 없게 되었지만, 천계영은 포기하지 않고 새롭게 일하는 방식을 고안해냈습니다. 바로 장애인용 음성 인식 프로그램을 활용해 목소리로 그림을 그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천계영은 또 다시 ‘만화를 그리는 것’에 대한 편견을 깨고 독자적인 작업 방식을 고안해냈습니다. 천계영 작가는 자신의 유튜브 계정에 이러한 작업과정을 라이브로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유튜브에서 공개된 Cinema 4D를 활용해 원고 작업을 하는 모습

넷플릭스에서 처음으로 드라마화된 원작 웹툰도 바로 천계영 작가의 작품이었습니다. 2019년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시즌 1이 공개된 <좋아하면 울리는>은 2017년 초에 처음으로 드라마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누구나 넷플릭스를 보는 지금과 달리 2017년은 넷플릭스가 한국에 막 진출했을 무렵이었고, 봉준호 감독의 <옥자>가 그해 6월 넷플릭스에서 극장과 ‘동시 상영’을 하는 것이 논란이 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엔 아직 낯설었던 글로벌 OTT에서 제작한다는 것, 그리고 기존의 방영 방식과 달리 전편이 한 번에 공개되는 등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제작은 일종의 도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드라마 <좋아하면 울리는>은 2019년 <킹덤>과 함께 한국에 넷플릭스의 기반을 다지는 데에 톡톡한 역할을 하고, 2021년에 시즌2도 공개되었습니다. 이렇듯 천계영은 언제나 선두에 서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길을 개척하며 ‘최초’의 길을 걸어나간 작가였습니다.


최초의 ‘짝짝짝’은 <좋알람>이 있어서 가능했다

웹툰 <좋아하면 울리는> 속 예능 프로그램을 실제로 구현한 연애 예능 ‘좋아하면 울리는 짝!짝!짝!’은 여러모로 원작을 존중하고 원작에 충실하려고 한 면이 많이 돋보인 예능 프로입니다. 원작처럼 좋아하는 마음을 어플이 감지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좋아하는 상대를 수동으로 고르게 되었지만,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나의 10m 반경 안에 들어오면 좋알람이 울리는 것은 충실히 구현해냈습니다. 게다가 프로그램 중간중간에도 원작 웹툰의 장면을 보여주거나 대사들을 인용했고,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퀴즈를 푸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나 외판원이 다양한 카드를 판매하고 그 카드를 하트로 구매하는 점, 진실게임 등 웹툰에 나온 요소들을 성실히 차용했습니다.

'짝짝짝'은 원작 웹툰을 자료화면으로 보여주고 원작 웹툰의 요소를 따온 것을 강조한다.

‘짝짝짝’이 처음부터 강조한 것은 ‘좋알람은 직업, 나이, 성별에 상관없이 좋아하는 마음에 의해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짝짝짝’은 프로그램 기획단계부터 이 점을 크게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출연자를 모집하는 공고부터 ‘이성을 좋아하든 동성을 좋아하든 상관없이 누구나’ ‘좋알람은 좋아하는 마음만 있다면 작동됩니다’라는 문구를 명시한 것입니다. 실제로 ‘스민장미’가 터지기 이전에도 여성 출연자 ‘구미호’는 사전 인터뷰에서 ‘여자한테도 마음이 열려 있다’고 했었고, 남성 출연자인 팅커벨은 같은 남성 출연자인 꽃사슴의 좋알람을 울리기도 했습니다.

'이성을 좋아하든 동성을 좋아하든 상관없이 누구나'라고 명시한 출연자 모집 공고

원작을 충실히 반영한 ‘짝짝짝’이, ‘성별에 무관하게 좋알람을 울릴 수 있다’고 강조할 수 있었던 것은 원작 웹툰에 해당 내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웹툰 <좋아하면 울리는>은 좋알람 어플이 상용화되면서 벌어질 수 있는 다양한 상황들을 그려냅니다. 그 중에는 학교에서 동성 친구를 좋아하는 게 좋알람 어플로 인해 원치 않게 드러나면서 따돌림을 당하고, 교사들이 그에 대한 대책회의를 하는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동성애 성향을 가진 학생 리스트를 작성해서 특별관리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전형적인 캐릭터도 등장하지만, <좋알람>은 결국 해당 에피소드를 통해 ‘동성이든 이성이든 좋아하는 마음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강조합니다.

천계영 작가는 데뷔 때부터 꾸준히 성별 이분법을 지양하고 열린 가치관을 작품 속에 녹여내 왔습니다. 데뷔작인 단편집 <컴백홈>에는 남성적인 외모를 가진 여성캐릭터가 남성 듀오로 가요계에서 활약하는 내용을 담은 단편이 실려 있고, <오디션>과 <DVD>에도 동성애 코드가 담겨있습니다. 꾸준히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온 천계영 작가는 언제나 좋아하는 마음으로 인해 피어오르는 감정과 갈등, 관계에 집중했지 그게 어떤 성별간에 벌어지는 이야기인지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즉, 그런 천계영 작가가 있었기 때문에 <좋아하면 울리는>이 있었고, 마침내 그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OTT 프로그램이 만들어져 방송에도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스민장미’는 천계영이 있어서 가능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천계영 작가는 작년 5월 웹툰 <좋아하면 울리는>에서 이름을 딴 카페 ‘좋아하면 울리는(러브 알람)’을 열었습니다. 이 카페는 여성 웹툰 작가 전용 카페로, 천계영 작가가 후배들이 좋은 환경에서 일하길 바라는 소망을 담아 만든 작업 공간입니다. 천계영 작가가 만화가로서 걸어온 지난 20여년은 지금 되짚어봐도 탄성을 자아낼 만큼 놀라운 행보 투성이입니다. 언제나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는 여성 작가가 한국 만화계에서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고, 그리고 그 작가가 선배로서의 책임을 느끼고 후배들을 위한 환경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는 건, 어떻게 생각하면 정말 감사히 여겨야 할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재 신작을 준비 중인 천계영 작가가 또 어떤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갈지 기대됩니다.

*참고자료

하효숙, 『​만화웹툰작가평론선 : 천계영』​, 커뮤니케이션북스, 2018

​최윤주, 「만화 전환기의 선구자, 천계영」, 『2022 만화포럼 칸』,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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