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카오루 내한 특집] 디지털의 시대, 종이에 옮기는 장인정신

〈엠마〉,〈​신부 이야기〉​로 우리 독자들에게 잘 알려진 작가, 모리 카오루가 처음으로 한국을 찾습니다. 모리 카오루의 독특한 필치와 장인정신, 그리고 환상을 그려낸 아름다운 세계는 독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SWI에서는 모리 카오루의 방한을 기념하여 ‘모리 카오루 내한 특집’을 준비했습니다. 모리 카오루라는 작가의 세계와 대표작인 <엠마>와 <신부 이야기> 속에 담긴 이야기들을 만나보는 시간입니다.

모리 카오루 작품 <신부 이야기> 3권 표지, 이미지 제공 = 대원씨아이


디지털의 시대다. 종이문서보단 디지털 파일로, 손으로 직접 글씨를 쓰기보단 키보드로, 물리적 키를 가진 키보드도 쓰이지만, 더 자주 쓰이는 건 스크린 위로 떠오르는 가상키보드다. 가만히 앉아서 지구 반대편의 소식을 접하고, 만나본 적 없는-심지어 만날 가능성이 아예 없는-대상을 깊게 사랑하기도 한다. 코로나19가 휩쓸고 지나간 후, ‘비대면’이라는 말은 이제 일상의 언어가 되었다. 그에 따라 현실과 구분되는 상상, 또는 실존하지 않는 세계인 ‘가상’의 경계가 흐려졌다.

이를 테면 내게 고향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놀던 놀이터는 아파트와 함께 재개발되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어린시절 다니던 골목도 이제는 새로운 상가가 들어서 아예 예전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바뀌었고, 이제 그 곳에 사는 친구들도 없다. 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에게 이런 모습은 아마 일상일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변치 않는 모습으로 나를 반겨주는 곳은, 오히려 가상세계다. 게임 “바람의 나라”의 국내성 북문, “마비노기”의 접속 종료 시간을 넘겨도 머물 수 있던 던전 속 모닥불 앞,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오그리마와 같은 곳들이다.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내가 살던 동네에 그대로 살고 있는 친구는 없다. 하지만 그들과는 소셜미디어, 메신저에서 여전히 연락을 하고, 가깝게 지낸다.

누군가는 이걸 두고 ‘진짜가 아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모두 파괴되고 사라져버린 현실의 공간들보단, 업데이트를 거치면서도 예전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가상공간이 오히려 ‘고향’이라는 의미에 가깝지 않을까? 아마 이런 생각을 본인만 하고 있는 건 아닐 것이다. 흔히 디지털은 가상이므로 존재하지 않고, 물리적 실체를 가져야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받아들이기 어려울지 모르겠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디지털은 ‘변하지 않을 수 있는’ 공간으로, 현실의 공간은 ‘변화하는’ 공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의견이 그리 이상한 이야기만은 아닌 2024년이다.


*취향이 만들어낸 ‘진짜 가상’

그런 의미에서 ‘모리 카오루’의 세계는 흥미롭다. 무엇이 실재하는지,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진 상태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1978년 태어난 모리 카오루(もり かおる, 森 薫)는 1980년대 일본 경제의 황금기에 유년시절을 보내고, 일본의 장기 침체기에 20대를 지났다. 모리 카오루가 다 자랄 때까지, 세계에는 ‘가상’이라는 개념이 낯설었다. 하지만 가상의 세계를 탐구하며 동인활동을 하던 모리 카오루는 출판만화 <엠마>로 데뷔한다. 그 이후 <엠마>와 <셜리>는 물론 <신부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한 시대를 테마로 자신의 취향을 담뿍 담은 세계를 그려낸다.

이 세계에서 모리 카오루는 ‘자신이 살아보지 않은’ 가상의 세계를 탐구하고, 작품을 통해 가상의 세계를 구현해 ‘재현(再現)’한다. 다시(再) 나타남(現)이라는 의미를 생각하면,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를 ‘재현’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언어도단이다. 하지만 모리 카오루의 작품 속 세계는 ‘있었을 것만 같은’ 세계로 독자들에게 읽힌다. 현실의 존재들에게 허락된 표정과 별다를 것 없는 자연스러운 일상은 독자들에게 모리 카오루의 세계가 비록 완전 가상의 공간이라 할지라도 ‘현실에 존재했음직한’ 세계로 받아들이는데 전혀 무리가 없다.

‘그럴싸한 가상세계’를 창조한 모리 카오루는, 현실의 종이 위에 펜과 잉크를 사용해 가상세계의 장면을 포착해낸다. ‘그럴싸한 가상의 공간’을 디지털을 이용해 가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 실체를 가진 무언가로 빚어내는 장면의 영상을 보고 있으면 인간의 취향과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에 대한 경외심이 생긴다.

현실을 기반으로 만들어낸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걸 담아내는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은 모리 카오루가 가진 취향이 빚어낸, ‘진짜 가상’인 셈이다. 과거에 존재했고,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깊은 탐구를 통해 ‘재현’에 가깝게 구현했다. 그 시대에 진짜로 존재했을지도 모를 세계를, 작가의 깊은 탐구와 상상으로 만들어냈으니 ‘진짜 가상’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그 세계가 담은 것은 다름아닌 모리 카오루 본인의 취향이다. 자신의 취향으로 왜곡한 세계가 아닌, 자신의 취향이 오롯이 담겨있는 세계에 대한 동경과 애착이 만들어낸 ‘진짜 가상’이다. 모리 카오루에게 세계란 자신의 취향을 그려낼 수 있는 도화지이자, 자신의 미학을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승되는 장인정신

그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세계는 안온하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불안하다. <엠마>의 세계는 곧 전쟁의 광기와 대공황, 전쟁과 질병으로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신부 이야기>의 세계 역시 스탈린 치하의 대숙청, 강제이주, 그리고 집단농장으로 인한 비극까지 이어지는, 너무나 예상 가능한 확실한 불행이 기다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리 카오루는 작품 속에서 계속해서 인간의 관계를, 그리고 그 관계에서 발생하는 행복을, 그리고 그 안에서 현재를 살며 다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다. <엠마>와 <신부 이야기> 속에서 기다리고 있는 불행한 역사를 모리 카오루는 그리지 않는다. 다만, 그 세계의 모습을 통해 독자들이 읽어낼 수 있도록 할 뿐이다. 모리 카오루는 본인이 ‘악인을 그리지 못한다’고 말했지만,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는 악 그 자체인 악인보단 평범한 개인이 훨씬 많다. 개인이 어찌 할 수 없는 거대한 불행이 삶의 터전을 파괴하더라도, 현재의 행복을 위해 하루를 살아내는 사람들을 그리는 것이 모리 카오루의 방식이다.

모리 카오루의 작품 속에서, 사람들을 모두 다가올 내일을 준비한다. <엠마>에선 일을 배우고 가르치고, <신부 이야기>에선 세상이 궁금한 어린아이들의 질문세례와 거기에 대답하는 어른, 수를 놓을 때 자신이 좋아하는 문양만을 수놓는 아이에게 꺼내놓아 보여주는 선조들의 문양에 이르기까지, 대격변의 시기에 아주 오래도록 이어져 내려온 것을 지키는 사람들의 태도로 다가올 변화에 상관없이 지켜야 할 ‘나의 것’, 그리고 ‘우리의 것’에 대한 작가의 태도를 보여준다.

작품 속 인물들의 태도는 어쩌면 또 다른 대격변의 시기, 그러니까 디지털 대전환의 시대에 종이 원고를 놓지 않는 그의 태도와도 이어져 있다. 인간이 유사이래 계속해서 해 온 ‘기록’이라는 전승, 그리고 다가올 불행과 비극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이어져 나갈 것이라는 믿음에 기인한다.

다가올 비극이 있기 때문에, 모리 카오루는 자신이 그리는 세계를 오롯이 안온하고 이상적인 세계로 그릴 수 있었다. 앞서 이야기한 ‘진짜 가상’을 그려낸다. 환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안온하고 이상적인 세계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있었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모리 카오루의 세계는 일종의 ‘이데아’의 현현이 된다. 모리 카오루가 창조한 이데아의 세계에서 인간은 자신의 행위를 잇고, 다시 이어받으며 삶을 계속한다.


*단단하게 새겨진 모리 카오루의 세계

이렇게 꾸며진 약속된 비극이 다가오기 전의 이상적인 세계는 모리 카오루의 그림을 통해 단단하게 현실에 고정된다. 미려한 그림으로 자리잡은 모리 카오루의 세계는 흔들림 없는 ‘진실’인 양 설득력을 갖는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 어려운 시대에, 모리 카오루는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를 현실에 구현한다. 디지털의 시대에 장인정신을 발휘하며 종이 위에 펜을 긋는 모리 카오루의 태도는 마치 구도의 자세처럼 보인다. 자신의 취향으로 시작했지만, 종이 위에 세계를 구현하는 모리 카오루의 작품세계는 디지털의 시대이기 때문에 오히려 경이롭다.

고향마저 디지털로 ‘전이’ 된 독자들에게 모리 카오루는 존재하지 않는, 또는 존재할 수 없는 공간이더라도 충분히 감동과 아름다움을 전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가상의 공간에 실존하지 않는 공간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받은 감동과 추억은 진짜일 수 있다. 모리 카오루가 기도하듯 그려낸 세계를 감상하다 보면, 그 세계의 밀도와 단단함에 숭고함이 느껴진다.

<엠마>속 메이드도, <신부 이야기>속 중앙아시아의 풍습도 모두 새로운 시대에 밀려 사라져간 구시대의 흔적들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사람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모리 카오루가 그려낸 세계가 그렇듯, 현실도 그랬을 것이다. 어쩌면 그건, 그의 작품이 그리고 있는 불행한 미래가 우리의 ‘불안한 미래’와 겹쳐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진짜 가상’을 그려내는 모리 카오루의 작품 속에서, ‘진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가 보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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