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연약함’을 주제로 단단함을 그리다, 『도둑소녀』 고미랑 작가
[뾰로롱을 소개합니다]
수많은 만화가 의미가 되는 순간. 그걸 만들어내는 건 만화를 읽을 때는 물론이고, 만화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다른 이의 감상을 알게 된 순간이 포함됩니다. 뾰로롱은 그런 순간을 만들기 위해 독립만화를 기록하는, 만화 없는 만화잡지입니다.
SWI와 공동기획으로 준비한 뾰로롱 코너에선 지면의 한계로 못 담은 이야기까지 꾹꾹 눌러담은 과월호를 공개합니다. 책에선 느낄 수 없는 무한 스크롤의 묘미지요.
그리고 뾰로롱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글을 전합니다.
가을, 만화 이야기를 책으로 엮고, 스크롤로 풀어내는 세 사람의 이야기와 함께 여러분에게 새로운 의미가 될 만화,
함께 찾아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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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만화 아카이빙 글 매거진 ‘뾰로롱’의 컨텐츠들이 SWI와 제휴하여 웹 지면에 발행됩니다.
만화를 처음 시작하는 마음으로
창작자가 관조적인 태도로 자전적 이야기를 풀어낼 때, 이야기는 그 어느 때보다 치밀하고 단단해집니다. 창작자의 불안한 과거는 매력적이고 현실적인 세계관이 되기도 하죠. 뾰로롱은 ‘만화를 처음 시작하는 마음으로’라는 창간호의 주제를 담아 이번호의 책을 고미랑 작가의 『도둑소녀』로 정했습니다.
만화 『도둑소녀』
만화 『도둑소녀』의 주인공 윤정은 훔친 돈으로 산 옷으로 자신의 연약함을 감추는 소녀입니다. 만화는 윤정과 자신의 연약함을 감출 수 없는 어른인 미지가 만나 서로에게 의존하는 내용입니다. 윤정은 시각장애가 있는 미지 언니로 인해 볼 수 있는 세계가 넓어집니다. 일상은 짙은 기쁨보다 적당한 불안감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화 『도둑소녀』를 시작으로, ‘연결된 감각’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작업하는 고미랑 작가를 만나보았습니다.
『도둑소녀』 책 정보
페이지수 : 164p
판형 : 150*205mm
출간일 : 2024년 11월 15일
판매가격 : 15,000원
내지구성 : 단편만화, 작가의말, 추천사(전지(작가)
장르 : 드라마, 에세이
ISBN : 979-11-989331-0-2
발행처 : 문화기획선 고잉미랑호
Q: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고미랑: 연결된 감각 안에서 만화, 미술을 하는 사람 입니다.
Q: 작가님이 소개하는 ⟨도둑소녀⟩라는 만화는 무엇인가요?
고미랑: 2020년에 어떤 노래에 꽂힌 적이 있는데, 제목이 ‘연약하다는 것은 약하다는 것이 아니야 (장혜영)’ 입니다. 노래를 듣다가, ‘연약함’이라는 단어가 저에게 너무 와닿았어요. 그 후로 ‘연약함’이라는 단어를 주제로 문화 기획 프로젝트를 운영했었고, 만화로도 풀어보고 싶었습니다. 제가 했던 만화들은 주로 다른 분들을 인터뷰하는 만화였고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며 거기에 저의 시선과 가치관을 녹일 수 있었던 거죠. 그런데 도둑소녀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저의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었던 작품이었습니다. 연약하고 취약했던 시절에 사람과 만나서 의존했던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었던 만화였어요.
Q: 만화를 창작할 당시와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 보았을 때 가장 변한 점이 무엇일까요?
고미랑: 만화책은 만들고 나면 도저히 못 펼쳐보겠는 것 아시나요? 너무 민망하고 그런 게 있어요. 다시 펼쳐볼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여러분들처럼 찾아와주시거나, 혹은 읽었다고 해주시는 분들을 통해서 다시 만화를 만나는 때입니다. 책이 나온 지는 1년이 흘렀지만, 제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사실 변함이 없습니다. 제 작가 프로필이나 포트폴리오에 늘 ‘연약함, 취약함, 연결, 의존’ 이런 단어들이 잘 등장하는데, 요즘도 그때 시절처럼 계속 휘청대고 있는 것 같아요. 다른 인물, 사건들로 휘청이거나 허우적대거나. 유독 저는 그런 갈등들이나 연결점이 더 많은 사람인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하기에 또 하나 달라진 점은, 제가 윤정이가 아니라 미지 언니의 나이대와 위치성을 갖게 된 거예요. 저도 미지 언니처럼 다른 사람과 함께하며 그들을 좀 더 살리는 관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사람 간에 서로 살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도 못했던 시기를 지나, 이제는 알지만 ‘아직 어렵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 같아요.
Q: 왜 윤정이 돈을 훔쳐서 옷을 쌓아두는 것으로 설정하셨는지가 많이 궁금했어요.
다른 것들도 많이 할 수 있잖아요. 예를 들어서 화장품을 많이 살 수도 있고.
고미랑: 윤정이라는 캐릭터는 옷 외에 화장품은 안 살 것 같아요. 옷은 방에 숨겨둘 수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입고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 옷이라는 물건의 기능이잖아요. 그러니 집을 나온 뒤 어디선가 갈아입어야 하는데, 그 장소도 청소도구함이기 때문에 굉장히 불안전하죠. 실제로는 청소 도구함보다 훨씬 불안전했던 장소였지만, 그래서 누구에게 들킬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극대화할 수 있는 아이템이 옷이 아닐까 했어요.
Q: 이제 미지 언니 얘기를 좀 하죠. 윤정이가 미지 언니를 만나고 나서 어떤 변화를 겪게 되잖아요. 제 개인적인 해석으로는 ‘자기뿐인 세상을 갖고 있던 한 소녀가 어떤 타인과 맞닥뜨리게 되면서 변하는’ 그런 빅 이벤트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면서 미지 언니가 윤정의 다양한 부분들을 건드렸는데, 가장 변화가 큰 부분은 어디였을까요?
고미랑: 외출할 때 저희는 쉽게 나갈 수 있지만, 미지 언니처럼 생활 전반에서 누군가 꼭 있어야 하는 사람은 저희와 다르잖아요. 그 점에서 윤정이가 자신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더 많이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윤정이가 옷이라는 매체에 좀 더 집중했던 것은 아무래도 치장하고 꾸미는 욕구가 강하고, 보이는 것을 중시했던 친구이기 때문이죠. 근데 그것과 반대되게 화장도 제대로 못 하고 촌스러운 것 같은 모습이 극대화된 분을 만나면서, 그분이 세상과 부딪혀서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고 눈으로 보는 게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더 알아갈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해요.
‘실기시험을 보았던 대학교들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다 떨어지고 나서는 가야 할 곳이 없어 계속 누워서 방바닥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도둑소녀⟩ 중
Q: 만화가 작가님의 어떤 부분을 건드리거나 변화시켰는지가 궁금해요.
고미랑: 만화책이 누군가의 앞에서 읽히기 전까지 내 얘기를 들어줄 대상은 만화 원고지뿐이잖아요. 그래서 만화는 제 이야기를 펼쳐놓을 수 있는 창구이고, ⟨도둑소녀⟩를 그리면서는 자전적인 이야기니까 제 마음이나 감정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어요. 또 대부분의 작품에서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인터뷰하면서 풀어내다 보니, 만화가 제게 타인의 삶을 좀 더 들여다볼 수 있게끔 하는 역할을 해주는 것 같아요.
Q: 작가님이 학창 시절 때 좋아했던 만화는 무엇인가요?
고미랑: 제 초중고 학창 시절에는 만화랑 비디오 대여점이 엄청 활발했던 시절이었어요.
300원에 빌릴 수 있었나? 일본 순정 만화를 거기서 엄청 많이 봤었어요. 보통 칸이 나뉘어져 있었어요. 저는 거의 100% 일본 순정 만화를 많이 읽었었고. 일본 순정 만화에서 기억나는 건 ⟨유리가면⟩이네요.
Q: 관련 에피소드가 있다면 들려주실 수 있나요?
고미랑: 그때는 만화 ⟨밍크⟩가 연재되던 시절이었어요. 두꺼운 만화 잡지 시절이었고, 또 그때 만화책에는 만화가의 집 주소도 적혀 있었어요. 지금은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의 저는 황미나 작가님 집 주소가 만화책에 적혀 있는 것을 보고 같은 동네인 걸 알게 됐어요. 그 후 무슨 용기인지 모르겠지만 장미꽃을 한 다발 사 들고 집으로 찾아가 그냥 초인종을 눌렀어요. 초등학교 한 5,6학년 때였고요. 그분의 어머니를 뵙고 그분의 집 마루에서 잠깐 담소를 나누고 다시 집에 돌아갔던 기억이 나요.
뾰로롱: 낭만적이네요.
고미랑: 지금 생각하면 그렇죠. 맞아, 엄청 낭만적이죠. 찾아갈 수 있었던 용기가 있었고, 못 만난 것도 더 낭만적이지 않나요?
Q: 만화를 인스타툰으로 먼저 시작하셨다고 알고 있는데, 인스타툰 시작할 때 가장 영향을 많이 받았던 작품이 뭔가요?
고미랑: 수신지 작가님의 ⟨며느라기⟩도 인상 깊게 보고 그 단행본도 구매했었고요.
제가 만화를 시작할 때가 2020년이었는데, 그전부터 영향을 준 작품들은 앙꼬 작가님의 ⟨나쁜 친구⟩랑 전지 작가님의 만화책들이었어요.
Q: 작가님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만화가 있으신가요?
고미랑: 최근에 읽은 만화책으로는 만리포 작가님의⟨돈덴⟩롸 오카자키 교코님의 ⟨핑크⟩ 속
여성 캐릭터들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읽혔어요. 만리포 작가님이 그리신 여성들의 인물은 부서지기 쉽고 때론 매우 정치적이며 욕망에 충실하죠. 약간의 대리만족을 느끼며
만화 인물 속 캐릭터들에 매력을 느끼고 있어요. 제가 그려낼 수 없는 군상들 같아서…
Q: 왜 출판만화를 선택하셨나요?
고미랑: 저는 굉장히 아날로그적인 사람이고, 이러한 성향이 자연스럽게 출판만화 작업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해요. 만화 하기 전 작업도 수작업들이었고, 문화 기획이라는 매체도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일이 잖아요. 성향이 좀 맞지 않았을까요?
Q: 대사들도 전부 손글씨로 작업하셨죠. 작가님께서도 수작업의 느낌을 좋아하시나요?
고미랑: 좋아하기도 하는데 피드백이 나쁘지 않아요. 향수가 불러일으키는 느낌이 그대로 좋다고 표현해 주시니까 더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제 취미 중 하나가 씨앗을 심는 것인데, 그러면서 손으로 흙 등 여러 가지 사물과 직접 밀착하는 것도 좋아하기도 하고요.
Q: 최근 들어서 가장 관심 갖게 된 재료나 탐구 과정이 있으신지 궁금해요.
고미랑: 재료는 사람이고, 탐구 과정도 사람이죠. 갈등 상황에서는 ‘어떻게 내가 저 사람과 같이 잘 살지?’라는 생각이 들잖아요. 갈등이 생기기 전까지는 살기에 바쁘다가, 촉발되는 순간 타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서로 살렸으면 좋겠는 거예요. 요즘 그게 제 목표입니다.
Q: 흑백으로 그리면 보통 톤을 얹거나 마커를 쓰는데, 왜 수채화를 사용하게 되셨나요?
고미랑 정확히 말해서 재료는 아크릴 물감과 먹입니다.
만화가 가지고 있는 기본 재료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여러 수작업으로부터 이어서 만화 작업을 시작했었기 때문에 처음엔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써 보다가 점차 형식과는 상관없이 작품의 정서적인 특성들에 맞춰 쓸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Q: 작업 시 자주 쓰는 펜이 있으실까요? ‘What’s in my 필통’ 해주세요!
고미랑: 만화를 수작업으로 작업 시에 사쿠라 피그마 펜을 주로 사용합니다.
샤프로 스케치하고요. 그리고 붓으로 아크릴물감, 먹 등을 이용하여 톤과 명암을 주고 있어요.
Q: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독립 만화란 무엇인가요?
고미랑: 말씀드렸듯 제 이야기를 꺼내놓을 수 있는 창구들 중 하나가 만화라고 생각하는데요. 독립만화는 제가 생각할 때 누군가의 평가 위에 바로 놓이지 않는다고 보거든요. 그래서 비교적 좀 더 자유롭고, 그래서 더 즐겁고, 그 영역에 저희가 속해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기에 더 솔직하게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다고도 생각했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아날로그 정서의 사람인데, 만화책은 제 속도에 맞춰서 펼쳐 볼 수 있고, 쌓아놓을 수 있는 매체잖아요. 그래서 제 속도에 맞춰서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아날로그 같은 인간에게 굉장히 친절한 매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Q: 마지막으로 동료 작가들에게, 혹은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
고미랑: 잡지 ‘뾰로롱’ 님들한테 하고 싶어요.
뾰로롱: 너무 좋은데요? 감사합니다.
고미랑: 이 연결감을 놓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렇게 열심히 할 수 있는 분들을 제가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감사했고, ⟨도둑소녀⟩를 어떻게 보셔서 연락을 주셨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이런 것 때문에 성장을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저도 언젠가 누군가를 계속 찾을 것이고, 또 누군가가 저를 찾아올 것이고. 그래서 누군가가 이렇게 저를 조명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정말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뾰로롱’ 팀 분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