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메아리치는 여성의 목소리. "여명기"

12명의 여성작가 앤솔로지 <여명기> (이미지: 텀블벅 펀딩 게시물)

“착하고, 행실도 바른 주인공들이 갖은 고초를 겪으며 사랑을 성취하는 고난 극복담” 박인하 교수는 <시대를 읽는 만화>(이런책)에서 1950-60년대의 순정만화를 당시 광고문구와 함께 이렇게 설명한다. 이후 만화방 시대를 지나면서 소수의 여성 작가들이 황무지를 개간하듯 개척에 도전했다. 그 결과 1986년 여성 만화가 9명(황미나, 김혜린, 신일숙, 김진, 이정애, 유승희, 이명신, 서정희, 황선나)이 모여 만든 창작 동호회 “나인”에서 만든 <아홉 번째 신화>가 폭발적인 반응을 얻는다. 그리고 1988년 최초의 여성만화잡지 <르네상스>가 창간(같은 책, 162-163)된다. 이후 많은 여성 만화 잡지들이 창간되었지만, IMF 이후 대여점과 인터넷의 보급으로 인한 불법 스캔본 증가, 출판만화의 불황에 쪼그라들게 된다.

1986년 9명의 작가가 펴낸 <아홉번째 신화>.
당시 비매품 1천부를 구하기 위해 수소문한 독자들이 줄을 섰던 일화는 아직도 유명하다.

2000년대까지 웹툰은 시장을 형성하지 못했고, 너무나 불안한 사업이었기 때문에 기성 작가들보단 젊은 작가들이 주로 참여하게 된다. 이 젊은 작가들은 당시 인터넷 문화를 주도하던 ‘게시판 문화’와 조응하며 많은 인기를 얻었는데, 대표적인 여성 작가로는 <낢이사는이야기>의 서나래, <나이스진타임>의 김진 등이 있다.

* 만화 속 여성의 목소리

하지만 2010년대 초기까지 여성 작가의 작품은 ‘여성’의 당사자성을 강조하기보단, ‘도시 생활자’를 강조하는 만화들이 많았다. 새롭게 등장한 젊은 작가들은 여성 캐릭터를 통해 성별을 막론하고 같은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잉여인간’으로 대표되는 젊은 세대의 표상을 그려냈다. 그리고 2013년 이후 플랫폼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생활툰은 보다 일상을 깊게 들여다보는 장르로 진화한다. 마일로의 <여탕보고서>(2014), 김환타의 <유부녀의 탄생>, 순두부의 <나는 엄마다>(2015), 단지의 <단지>(2015)와 같은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이들 작품은 생활 속 ‘여성’이 겪었거나, 겪는 일을 전면에 드러내는 작품으로, 생활툰이 가진 당사자성과 자기고백적 서사를 활용했다.

순수 창작 여성서사로 1억 4천만원이 넘는 펀딩에 성공한 <여명기>

이후 이른바 ‘메갈리아’와 ‘티셔츠 사태’로 대표되는 ‘페미니즘 리부트’를 겪으면서 여성 작가들은 만화를 통해 적극적으로 여성 당사자의 목소리를 내는 한편, 만화의 서사적 측면에서도 여성 중심의 서사가 주목받게 된다. 하지만 웹툰의 상업적 특성상 로맨스에서 남성의 역할을 변화시키거나, 기존 장르물에서 주인공의 역할을 바꾸는 식의 비틀기가 주된 흐름이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2020년 나온 <여명기>는 1986년 ‘나인’의 <아홉 번째 신화>가 오버랩된다. 당시 비매품 1천부를 완판하고, 3호까지 3천부를 발매했던 <아홉번째 신화>처럼 <여명기>역시 텀블벅 크라우드펀딩에서 4,455명이 참여해 1억 4천 200여만원을 펀딩하는데 성공했다. 2020년에 나타난 또다른 여성 서사의 진화를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 지워진 여성의 목소리, 작품으로 되찾다

어제(4월 9일) 도착한 따끈따끈한 단행본.

“여성 주연, 비 로맨스”를 테마로 하는 앤솔로지(문집)인 <여명기>는 “프로와 아마추어를 넘나드는 열두 명의 여성 작가, 우리들의 이야기를 해보고자 모였습니다”라고 텀블벅 페이지에서 자신들을 소개한다. AJS, 코익, 앵몬, HOSAN, 서각, 마노, 남수, 하토, 뻥, 마빈, 꾸마, 이요로 이루어진 이 팀은 앞서 이야기한 두가지의 테마를 제외하곤 어떤 제약도 두지 않고 작품을 만들었다. 출판만화의 형식으로 만들어진 이 작품들은 흑백으로 인쇄되었다. 웹툰 방식으로 작업을 주로 하는 작가들이 출판만화 형식으로 작품을 만든 것 자체가 독자들에겐 신선하게 다가온다.

무엇보다, <여명기>는 SF, 판타지, 현대물 등 장르를 넘나들며 오직 한 가지, 여성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상, 하로 나뉘어진 이 책의 주인공은 모두 여성이고, 여성이 전하는 여성의 이야기만이 주목받는다. AJS의 <플랑크톤의 귀향>에서는 열심히 살았지만 집값 때문에 밀려나 플랑크톤을 연구하는 친구와 함께 살게 된 주인공의 이야기를, 코익의 <아구 속에는 무엇이 있나>는 동료에게서 나는 입냄새인 줄 알았던 악취의 비밀을 주인공이 깨닫는 과정을 코믹하게 그린다. 앵몬은 <어떤 날>에서 장녀에게 씌워진 굴레를 벗어던지게 된 주인공을, HOSAN은 <시스터후드>를 통해 ‘탈코르셋’을 한 주인공과 언니의 이야기를 전한다.

독자들은 일부러 의식하지 않는 한,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여성이라는 점을 인지하지 못할 것이다. 도구화되지 않은 여성의 목소리는 서각의 <이스파라의 마녀>처럼 전쟁을 다룬 일종의 역사물에서도, 마노의 <Teller>와 같은 SF에서도, 남수 작가의 <몽해>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들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하는 판타지를 통해 현실의 문제를 짚는다. 특히 필리핀에 간 주인공의 이야기를 그리는 <몽해>의 주인공의 이름은 이 설이다. 영어식으로 표현하면 설 리, 작가는 자신이 필리핀에 있던 당시 작고한 故설리씨를 추모하고 싶었다고 이야기했다.

하권에서는 하토가 <세상은 거대한 거짓말>을 통해 미성년자 주인공의 이야기를 판타지와 엮었고, 뻥의 <최저임금을 위하여>는 노년층의 노동문제를 넘어 ‘인간 노동’이 쓸모없어진 미래에 일자리를 잃은 인간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다. 마빈이 그린 <노아의 방주>는 인류가 절멸한 시대에 중년 여성과 어린 아이가 친구가 되는 이야기를, 꾸마의 <태양이 뜨지 않는 도시>는 판타지 세계관에서 해 뜨는 시기가 늦춰지는 이유를 찾는 두 인물이 친구가 되는 과정을 그린다. 이요의 <소쩍새의 울음소리>는 마녀로 불리는 아이가 홀로 자라나면서 겪었던 일들을 알게 되면서 어른이 되는 과정을 그린다.

여기 적은 열 두 작품은 모두 가상의 이야기다. 하지만 분명히 현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청년’이라는 이름에서 삭제되거나 쪼그라드는 여성, ‘노동자’라는 말에서도 사라져버리고 마는 여성, ‘노인’이라는 말에서도 찾기 힘든 여성을 찾아내 무대 위로 올린다. 대중매체에서 ‘어머니’ 또는 ‘성적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여성이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가진 목소리의 주체로 여성이 등장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은 건, 이미 오래 전부터 작가들이 계속해서 작품 속 여성의 목소리를 찾아줄 방법을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여명기>에서는 목소리뿐 아니라 얼굴과 몸을 되찾는다. 작가들은 과장된 신체, 분절되고 조각된 전시용 상품이 아닌 살아있는 인간의 몸을 그린다. 극적인 장치를 위한 도구나 부품이 아니라 극 자체를 이끄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작품 속 여성은 나이도, 키나 몸매도 상관없는 등장인물로써 존재한다. 다이빙을 하는 사람은 넓은 어깨와 단단한 근육을, 청소노동자는 땅딸막한 키에 통통한 볼을 가졌다. 또 여성 등장인물에게서 냄새가 날 수도, 머리카락을 밀어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이 작품 속에서는 유쾌하게, 때로는 비장하게 그려지기도 한다.

여성 작가들의 목소리는 1986년 <아홉번째 신화> 이후 90년대의 황금기를 맞는다. 2000년대의 암흑기를 거치면서도 젊은 작가들의 생활툰을 비롯한 다양한 시도는 만화를 현실의 세계와 이어왔다. 2010년대, 페미니즘 리부트를 통해 여성 작가가 당사자의 목소리를 직접 낼 수 있는 대중매체로 발전한 웹툰은 여성 작가들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분야로 성장했다.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이 책은 큰 의미를 갖는다. 지금, 여기에서 성장한 젊은 작가들은 30여년 전 작가들의 목소리에 응답이라도 하듯 2020년대를 여는 <여명기>를 내놓았다. 지금, 이곳을 살아가는 여성 작가들의 목소리가 이 책에 담겨 있다. 독자들이 책을 펼치는 순간, 목소리는 다시 현실과 호응하는 메아리가 된다. ​4,455명을 넘어 더 많은 독자들이 이 책에서 작가들이 그려낸 여성의 목소리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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