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탕 4화] 마법소녀와 로맨스판타지의 상관관계

로맨스판타지 장르에 접근할 때 가장 대표적인 방법은 로맨스 장르의 계보에서 로맨스판타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로맨스 장르 안에서 익히 다루어졌던 사랑의 방식이 판타지 세계를 배경으로 할 때 어떻게 전개되는지, 또 이 안에서 사랑은 어떤 의미로 재전유되는지 해석하는 방식이다. 특히 최근에는 작품들이 어떤 방식으로 로맨스의 장르적 클리셰를 해체하는지 살펴보는 것도 중요한 비평 작업 중 하나였다(홍난지, <내 맘대로 될 거긴 한데 ‘재미’있게는 해 드릴게>, 웹툰인사이트).

그런 한편 로맨스판타지를 판타지의 조류에서 바라보면 어떨까. 여성 캐릭터가 힘을 각성하고 눈앞의 역경을 극복하는 이세계물로서 로맨스 '판타지' 말이다. 로맨스 장르의 흐름 속에 로맨스 판타지가 곧잘 현대로맨스와 비견되었다면, 판타지의 계보 속에서 비교군으로 꼽고 싶은 건 단연 '마법소녀물'이다. 길항하는 두 세계 속에서 비밀스러운 힘을 획득하는 여성의 서사라는 것, 그리고 여성 독자를 타깃으로 제작된 장르라는 사실 등 마법소녀와 로맨스판타지는 서로 많은 부분 닮아있기 때문이다.

마법소녀는 누구인가?

일반적으로 1960년대 요코야마 미츠테루가 ⟪리본⟫에서 연재한 만화 <요술공주 샐리>를 마법소녀물의 시초로 꼽는다. 샐리는 이세계에서 왔으며 마법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 마법을 이용해 곧잘 친구들을 도와주곤 한다. <요술공주 샐리> 이후 등장한 마법소녀물은 <비밀의 앗코짱>이다. <비밀의 앗코짱>은 샐리와 달리 변신하여 마법을 수행했고, 특히 ‘콤팩트 거울'이라는 마구까지 지녔다. 변신과 마법 도구라는 마법소녀물의 대표적인 장르적 요소가 처음 등장한 것이다.1)

마법소녀물의 시초로 일컬어지는 <요술공주 샐리>

마법을 통해 일상의 사건을 해결하던 소녀들은 1990년대 이후엔 본격적으로 적과 싸우기 시작한다. 1990년대를 풍미했던 마법소녀 만화 <미소녀전사 세일러 문>의 세일러 전사들은 ‘다크킹덤'과 전투를 벌이고, <카드캡터 사쿠라>의 사쿠라도 크로우카드를 봉인하기 위해 싸운다. 오래된 숙적 ‘다크킹덤’이 사라진 이후 세일러전사들은 다시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고, 사쿠라도 ‘크로우카드’를 몽땅 ‘사쿠라카드’로 바꿔낸 뒤엔 현실 속 사랑을 이룬다. 변신한 뒤 마법을 이용해 적과 대결하는 구도가 마법소녀물의 중추적 스토리텔링으로 자리 잡자, 이 관계성을 비튼 작품도 등장했다. 만화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는 마법소녀가 대적해 싸우는 ‘마녀'가 알고보니 과거에 활동하던 마법소녀들이었다는 충격적인 설정을 다룬다.

마법소녀들은 마법의 힘을 이용해 변신한다. 박인하(1999)는 이를 소년을 대상으로 한 거대로봇물의 주인공들과 비교했다. “소녀를 대상으로 한 마법소녀물의 주인공은 귀엽고 착한 이미지 등을 강조하고 '마법'을 통해 '변신'해 '힘'을 획득하는 데 비해, 거대로봇물의 주인공은 정의롭고 용감한 이미지를 강조하며 '로봇'에 '결합'해 '힘'을 획득한다. 힘을 획득하는 과정만 보더라도 마법소녀물의 주인공들은 '수동적'이고, 거대로봇물의 주인공들은 '능동적'이다.”2) 이에 더해 마법소녀들 중 대다수는 스스로 마법소녀가 될 수 없는 존재다. <세일러 문>의 주인공 ‘츠키노 우사기'는 전생의 연으로 마법소녀가 되고, <카드캡터 사쿠라>의 주인공 ‘사쿠라'도 주변 인물들이 가졌던 비밀을 통해 마법소녀로 선택된다. 작품 초반에 이들은 자신이 왜 싸우는 건지, 나아가 자신의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 세계의 비밀을 모르는 존재로 그려진다. 성장 서사의 문법을 착실히 따르듯, 이들은 적과 맞서 싸우면서 서서히 자신의 능력을 깨닫고 조율하는 법을 배워나간다.

마법소녀물은 소녀들의 욕망이 투시된 작품이면서, 시대가 바라는 소녀들의 상이 반영된 장르였다. 마법소녀의 캐릭터들은 비밀스러운 힘을 쥐고서도 현실세계와 마법세계에 조화롭게 녹아들었고, 정의 구현에 기여하면서도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다. 흥미로운 건 작품에서 드러나는 세계와 소녀의 관계다. 소녀들은 스스로를 희생해 세계를 지켜내는 데도 불구하고, 세계와 소녀의 관계는 여전히 일방적이었다. 마법소녀들은 적과 수도 없이 싸우고 난 뒤에야 전쟁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마법소녀를 다룬 웹툰 <징벌소녀>는 이러한 마법소녀와 세계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다룬다. 이 작품에서는 마법소녀를 지명해 마법의 힘을 줄 수 있는 '계시자'가 있는데, 계시자는 정의가 무엇인지를 결정한다. <징벌소녀>의 마법소녀 '태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그 아이(계시자) 입맛에 맞는 정의를 맞추려 노력해야 했지. 어느날 변덕이 든 듯 말하더라. 마법소녀를 그만두라고.” 마법소녀들은 끊임없이 나타나는 적으로부터 세계를 수천, 수만 번이나 구해내지만 그들에게 세계를 조망하고 정의를 논할 권리는 주어지지 않는다. 적은 왜 자꾸 나타나는가? 우리는 왜 그들과 싸워야 하는가? 그들은 질문할 수 없는 존재다. 질문을 던진 이들은 이미 마법소녀가 아니게 되었으므로.

레진코믹스에서 연재된 웹툰 <징벌소녀>

‘세계'와 ‘여성'의 관계성

반면 로맨스판타지의 여성 주인공들은 처음부터 세계의 비밀을 알고 있다. 회귀・빙의・환생을 통해 이들은 세계의 규칙과 미래의 일을 미리 인지했기 때문이다. 세계의 정보를 손에 쥔 그녀들은 그녀들의 존재 자체가 세계의 '비밀'이 된다. 마법소녀가 아니므로 마법 같은 힘은 없지만, 대신 주인공들에게는 다른 세계에서 쥐고 온 무언가가 있다. <여왕 쎄씨아의 반바지>의 '유리'는 재봉 기술과 의복에 대한 지식을, <외과의사 엘리제>의 '엘리제'는 현대의 의학 기술을 습득했다. 이 능력들은 마법소녀가 지닌 힘에 비해선 다소 평범하고 초라해 보이지만, 누군가의 개입으로 사라질 일 없는 그녀 자신들만의 것이다.

마법소녀와 로맨스판타지의 여성 주인공들의 차이는 뚜렷하다. 마법소녀는 세계와 정의를 구원하지만, 로맨스판타지의 여성 주인공들은 자신을 구원한다. 방법은 각양각색이다. 미래에 자신에게 닥칠 위험을 미리 판단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하여 위기를 직접적으로 모면하는 이들도 있고(<이번 생은 가주가 되겠습니다>, <레이디 투 퀸>, <시월드가 내게 집착한다> 등), 고통에 빠진 '최애'를 도와 로맨스를 이룩하는 이들도 있다(<버려진 나의 최애를 위하여>, <남주의 첫날밤을 가져버렸다>, <엔딩 후 서브남을 주웠다>).

마법소녀물에서 세계는 마법소녀가 지켜내야 하는 공간임과 동시에 마법소녀를 소외시키는 공간이다. 그러나 로맨스판타지의 세계는 다르다. 작품에 따라 편차가 있지만, 여기에서의 세계는 특정한 규칙이 있거나 거래가 가능한 공간이다(<빙의자를 위한 특혜>, <내 동생 건들면 너희는 다 죽은 목숨이다>). 이 안에서 주인공은 세계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자신의 앞날을 스스로 결정해 나간다. 대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개인의 존립을 위해서.

장르는 어떤 욕망을 담아내는가

1990년대 크게 유행했던 마법소녀물은 소녀의 욕망과도 겹쳐 읽힌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던 시기, 그 시대의 소녀들은 커리어우먼을 꿈꿨다. 대중문화 비평서 ⟪마법소녀는 왜 세상을 구하지 못했을까?⟫는 이 현상을 정확히 꼬집는다. 이 책은 <세일러 문> 시리즈 디렉터를 맡은 이쿠하라 쿠니히코의 발언을 인용한다. “<세일러 문> 시리즈는 사회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맡아 일하는 오늘 날의 직장 여성들을 본따 만들어졌다. 그리고 <세일러 문>을 보던 모든 소녀가 바로 그 '일하고 소비하는 커리어우먼'을 꿈꾸고 있었지요.” ​3)

마법소녀 장르에서 소녀들은 마법의 힘을 손에 쥐고 있지만, 세상은 여전히 그녀들에게 수수께끼의 공간으로 남아있다. 세계는 소녀들에게 어떠한 권한도 나눠주지 않는다. 그러나 로맨스판타지 장르의 여성들에게 세계는 이미 ‘다 파헤쳐진 곳'이다. 그녀들은 스스로 비밀이 되기를 자처하며 세계와 대담하게 거래한다. 삶을 다시 한번 ‘제대로 살아보겠다는' 욕망이다. 이는 ‘리셋 증후군’과도 닮아있다.

로맨스판타지 작품의 여성 주인공들은 대체로 불행한 삶을 보냈다. 재능이 있었으나 꽃 피워보지 못한 채 죽음을 맞고, 억울하게 몰려 사형당한다. 절망적이고 괴로웠던 시간 속에 결국 파멸을 맞이했던 주인공들은 회귀・빙의・환생으로 새로운 기회를 얻는다. 로맨스판타지에서 보이는 이러한 특성들은 최근 재해석된 마법소녀물에서도 발견된다. 마법소녀를 다룬 소설 ⟪마법소녀 은퇴합니다⟫에서는 이런 대사가 등장한다. “마법소녀가 생겨나는 이유는 그 사람에게 그 힘이 가장 필요했기 때문이니까. 거꾸로 말하면, 각성 직전의 마법소녀란 세계에서 가장 취약한 존재.”4) 이 소설에 등장하는 마법소녀 중 한 명은 가정폭력 피해자다. 가해자에게 폭행당하던 와중, 소녀에게 갑작스럽게 마법의 힘이 주어진다.

박서련의 소설 <마법소녀 은퇴합니다>

고통스러운 삶의 끝에서 보상처럼 주어지는 새로운 세계 속에 주인공은 ‘리셋’하듯 편입된다. 자기 자신만의 힘을 통해 스스로의 생존을 일궈내는 로맨스판타지의 여성 주인공들은 마법소녀의 소녀들과 달리 대의를 추구하지 않는다. 이건 장르의 한계가 아니라 이 장르를 통해 확인되는 독자들의 욕망이다. 왜 그들은 생존을 도모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살아남기 어렵기 때문이다.

2018년 425명, 2019년 534명, 2020명 622명5). 스스로 목숨을 끊는 20대 여성 청년은 매년 많아지고 있다. 이 외에 응급실에 이송된 자살시도자나 우울증 환자의 증감 통계에서도 20대 여성 청년의 비중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다. 언론에서는 이에 대한 이유를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장기 실업 등을 꼽는다6).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고통들이 여성 청년들 사이에 상존한다.

로맨스판타지의 세계엔 대의도, 정의도 없다. 그녀들이 억울한 죽음을 맞았을 때, 그녀들을 보호해 줄 공동체가 이미 없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 마법소녀 장르에서 소녀들이 마법봉을 번쩍 들고 정의의 힘을 외칠 때, 그곳엔 그들이 지켜야 할 공동체가 있었다. 그 공동체 안에서 소녀들은 국가 공동체가 요구하는 소비자이자 가부장제를 지탱하는 착하고 성실한 여성으로 호명7)된 존재였다. 그러나 그때 마법소녀물의 열렬한 소비자였던 소녀들은 지금 우리 사회로부터 어떠한 보호를 받고 있는가? 그녀들은 자기 삶을 과연 안전하다고 여길까?

지금 창작되고 있는 마법소녀물, 그리고 로맨스판타지 작품들은 하나같이 이 질문에 고개를 젓는다. 그녀들은 왜 세계를 구하지 않느냐고? 세계가 그녀들을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이 세상에서 그녀들을 도울 수 있는 건 오로지 그녀들 자신뿐이므로8).

1) 박인하, ⟨일본 애니메이션 장르 연구:마법소녀물을 중심으로⟩, 만화애니메이션연구 3권, 1999, 101쪽

2) 위의 글, 101

3) 백설희・홍수민, ⟪마법소녀는 왜 세상을 구하지 못했을까?: 소녀가 소비하는 문화, 그 알려지지 않은 이면 이해하기⟫, 들녘, 2022, 107쪽

4) 박서련, ⟪마법소녀 은퇴합니다⟫, 창비, 2022

5) 2020년 사망원인 통계 결과, 통계청, 2021.09.28.

6) ‘조용한 학살’, 20대 여성들은 왜 점점 더 많이 목숨을 끊나, 임재우, 한겨레, 2020.11.13.,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69898.html

7) 백설희・홍수민, 위의 책, 103-104쪽

8) 네이버웹툰에서 연재 중인 로맨스판타지 작품 <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 법>(아인, lnk. 성혜림)의 75화 “널 도울 수 있는 건 너뿐이야” 대사의 패러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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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칼럼의 후일담은 팟캐스트 '웹투니스타'의 파일럿 방송 <그 비평가가 로판에 고료를 탕진한 사연>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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