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탕 8화] 지상 최고의 북부대공은 누구인가?


들어가며

사계절 꽃이 흐드러지고 명랑함이 만개할 것만 같은 로맨스판타지 세계에도 어두움이 존재한다. 혹독한 추위, 무채색 풍경, 음울한 분위기. 그 속에서 음과 양의 조화를 지킬 기세로 뚝심 있게 세계의 그림자를 도맡는 이들이 있다. 로맨스판타지의 유구한 남자주인공 ‘북부대공’ 이야기다. 북부대공은 이제 하나의 종족(?)으로 받아들여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종족을 설명할 때 으레 그렇듯 그들에 관한 고정관념이 선명하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고정관념을 넘어 아예 정언명령처럼 북부대공이라면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조건들이 자리 잡은 것도 같다.

의복과 머리카락은 겨울 풍경을 해치지 않도록 무채색만 허락된다. 눈동자는 되도록 적안이 좋다(붉은 눈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 적안이라고 불러야 한다). 대체로 무뚝뚝하거나 화난 표정을 지으며 어쩌다 웃는다면 미소가 ‘비릿’해야 한다(피식 웃는 것까지는 괜찮다). 자주 토벌이 예정되어 있으니 기골이 장대해야 하며, 혹독한 기후에도 어깨를 당당히 펴면서도 가끔은 나른한 자세를 취할 수 있도록 추위에 의연해야 한다. 평판은 최악이어야 한다. 모기향으로 모기를 쫓듯이 흉흉한 소문이 꺼지지 않게 해 항시 적을 견제해야 한다. 고독해야 하나, 이쯤 되면 자연스레 고독해진다. 말하면 스포일러가 되는 사연 하나씩은 갖춰놓고 언젠가 찾아올 연인에게 비밀스레 건넬 수 있어야 한다. 참아왔던 눈물은 그때 가서야 흘릴 수 있다.

로판 좀 꽤나 읽어봤다고 자부하는 이라면 이쯤 그간 봐왔던 북부대공의 얼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갈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이런 질문을 해본 적은 없는가. 언제나 세계관 최강의 자리를 자타 의심받는 법이 없는 이들 북부대공이 한자리에 모인다면 어떻게 될까? 그 쓸 데는 없으나 해보면 재밌을 것 같은 경연을 위해, 여기 4명의 북부대공을 모았다.

[후보 1] 휴고 타란 : <루시아>의 북부 타란의 대공. 북부대공에 대한 편견 그 자체이자 원천으로, 클래식한 매력의 소유자다. 전장의 흑사자라 불린다.

[후보 2] 킬리언 알렉산더 악시아스 드 라디언트 : <마른 가지에 바람처럼>의 북부 악시아스의 대공. 철인 정치를 주장했던 플라톤이 무덤에서 일어나 춤을 추며 기뻐할 성군이다. 하지만 미친 폐황자, 피비린내 나는 소문을 몰고 다니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불린다.

[후보 3] 리히트 드 슈테른 : <엔딩 후 서브남을 주웠습니다>의 북부 슈테른의 대공. 좀생이 같지만 볼수록 귀엽다. 별명은 없으나 누구의 다리를 부러뜨렸다거나 팔을 잘랐다는 말이 흉흉히 퍼져 있다.

[후보 4] 페루스 테르미네 : <아무튼 로판 맞습니다>의 북부 테르미네의 대공. 북부대공에 관한 어지간한 편견은 죄다 이 악물고 반대로 충족하는 신세대 북부대공이다. 야수 대공이라 불리며 멸시당한다.


[첫 번째 종목] 미모(육체미): 타란 = 악시아스 < 슈테른 (측정 불가) 테르미네

타란 대공과 악시아스 대공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북부대공의 외형이다. 장대한 기골, 흑발과 적안, 날카로운 눈매, 본인들도 만족하는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들이다. 반면 슈테른 대공은 전부 갖췄으나 적안이 아닌 흑안을 가졌다. 만약 정형성이 심사 기준이었다면 뒷순위로 밀렸을 것이다. 하지만 슈테른 대공은 부족한 동공의 존재감을 또 다른 육체미로 채운다. 많은 독자들로 하여금 ‘흉부가 기가 막히다’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 엄청난 육체적 매력의 소유자… 아름다움이란 것은 결국 사회적 기준이니, 독자들이 좋다면 그걸로 된 것 아닐까?

그런데 그렇게 안일한 생각이 들 때쯤 테르미네 대공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장대하다 못해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듯한 거대한 몸,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 언제 빗었는지 알 수 없는 산발이 된 머리와 추워서 기른 걸까 궁금증을 자아내는 덥수룩한 수염. 짙은 흑발과 형형한 적안만이 그가 산적이 아니라 대공이라는 사실을 희미하게 증거할 뿐이다. 그의 얼굴이 묻는다. 북부대공이 꼭 잘생기란 법 있나요? 그렇게 싸움터에 몰아넣고 얼굴이 매끈하길 기대하다니 너무한 것 아닌가요? 그러고 보니 그렇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필자는 테르미네 대공을 읽는 동안 단 한 번도 미모에 홀려 스크롤을 멈춘 적이 없다. 그리고 그 사실은 중요한 교훈을 남긴다. 북부대공의 매력은 결코 외형적 아름다움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고. 속히 다음 종목을 살펴보도록 하자.



[두 번째 종목] 재력: 슈테른 << 테르미네 << 타란 < 악시아스

북부대공은 당연히 돈이 많을 것 같지만 슈테른 대공의 사정은 그렇지 못하다. 영지민들은 춥고 굶주리며, 영주인 슈테른 대공조차 소박한 상차림이 일상이다. 약혼녀 피오니에 공주를 내쫓기 위해 일부러 장작을 아낄 때는 재정이 아니라 옹졸함이 문제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나머지 대공들과 비교했을 때 압도적으로 형편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4위. 테르미네 대공은 부족함이 없는 것 같지만, 결국 경제적 부 역시 미모처럼 상대적이다. 아내 리테라의 압도적인 경제력과 비교해 자랑할 만큼 넉넉해 보이지는 않는다. 3위.

타란 대공과 악시아스 대공 중 누가 더 부유한지는 대대적인 연구가 필요할 테지만,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둘 다 엄청나게 부유하다는 것이다. 타란 대공은 대대손손 물려받은 타란 가의 재산이 엄청나다. 루시아와 결혼하며 지참금으로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는 섬쯤은 흔쾌히 넘기고 승마에 관심 가진 아내를 위해 여성 전용 승마장을 만들 정도다. 악시아스 대공은 북부의 광물과 마수를 자원 삼아 번영한 영지를 일궈냈다. 빌려준 2천만 골드 정도는 상황에 따라 없던 일로 삼을 수 있다. (참고로 서민 3인 가구의 1년 생계비가 2천 골드다.) 마르지 않는 두 곳간의 우위를 논하는 것만큼 무의미하고 기운 빠지는 일이 또 있을까. 하지만, 자고로 돈이란 얼마를 어떻게 버는가만큼 어디에 쓰는가가 중요한 법이다. 악시아스 대공은 2천만 골드를 과부 한 사람을 구해내는 데 쓰며, 넘쳐나는 영지의 돈을 역병을 막고 영지민들의 자립을 돕는 데 아끼지 않는다. 새해에는 악시아스 대공처럼 벌어 악시아스 대공처럼 씁시다, 이만한 덕담이 없다. 각각 2위와 1위다.

이것이..북부대공의 재력...?


[세 번째 종목] 전투력: 슈테른 < 악시아스 < 타란 < 테르미네

자고로 북부대공이라면 (미모는 없어도) 전투력은 갖춰야 한다. 혹한과 굶주림에 맞설 튼튼한 몸과 적을 물리치고 내 사람들을 지킬 세계관 최강 수준의 검술. 하지만 그 안에도 편차가 있다. 공교롭게도 슈테른 대공은 재력에 이어 전투력도 최하위다. 강하긴 강하지만, 험난한 산행으로 몸이 쇠하거나 독침 한 방에 정신을 못 차리는 모습을 보인다. 술도 못 마셔서 기습당할 것 같다. 악시아스 대공이 마수도 때려잡는 것과 비교하면 주적이 늑대인 슈테른 대공의 실력은 여러모로 인간 수준에 그치는 현실적인 전투력이라 할 수 있겠다. 사실, 악시아스 대공 역시 늘 황비의 계략으로 목숨을 위협받는 처지다. 보는 독자가 조금이라도 안위를 걱정하게 한다는 점에서 두 대공 다 하위권이다.

타란 대공과 테르미네 대공은 탈인간급의 실력을 지녔다. 심지어 타란 대공은 지독한 권태와 자기혐오로 피에 굶주린 과격한 성미의 소유자다. 일 년의 절반을 피 냄새를 맡으며 살생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미친 전투 본능. 테르미네 대공 역시 단 한 번도 진 적 없는 엄청난 전투력을 보인다. 하지만 두 사람이 겨룬다면 테르미네 대공의 승리이지 않을까. 타란 대공이 루시아를 만난 뒤 전장에 흥미를 잃은 반면, 테르미네 대공은 아내의 옷깃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기 위해 전보다 더 전력을 다해 싸우기 때문이다.


[네 번째 종목] 도덕성: 타란 < 슈테른 = 테르미나 <<< 악시아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종목은 악시아스 대공을 위한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흔히 북부대공 하면 포악한 성정이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이고 그 역시 대외적으로는 평판이 좋지 않다. 하지만 그것은 전부 의도해 만들어진 것이며, 실상은 영지를 다스리는 군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부단히 고민하고 노력하는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대공이 전쟁터에서 구한 어린이와 도적 떼로부터 구해낸 아이, 그 외 대공의 도움을 받은 수많은 사람이 결국 대공과 함께 역병을 막고, 숱한 위기를 이겨내며 악시아스를 풍요롭게 일궈내는 과정은 인간의 선의가 순환될 때 얼마나 많은 것들이 가능한지 희망을 품게 한다. 도덕 교과서 사례로 실려도 모자람이 없다. 필자 역시 악시아스 대공을 존경한다. 진심으로.

다른 대공들도 업무에 충실하다. 가난한 영지민에게는 세금 대신 조촐한 공예품을 받는 슈테른 역시 성군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대체로 말과 태도가 자기 사람, 정확히는 연인에게만 관대하고 그 외 엉망이기에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 악시아스 대공이 없었다면 본 종목은 나머지 대공들의 체면을 위해 차라리 없는 것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다섯 번째 종목] 후회력: 테르미네 < 악시아스 << 타란 = 슈테른

‘남자주인공이 나중에 10배로 구를(= 매달리고 울며불며 고생할) 생각하니까 짜릿해 미칠 것 같아요.’ 세상은 넓고도 깊어서 순정한 구애보다는 후회와 미련으로 점철된 뉘우침을 반기는 비틀린 욕망을 지닌 독자들이 존재한다. 나를 포함해서. 그 욕망을 프로이트적으로 해석하면… 피곤해지니 그냥 그런 취향이 있다는 정도만 말해두자. 아무튼간에 이런 독자들에게 남자주인공이 초반부 부리는 패악이란, 말하자면 일종의 적금과도 같은 것이다. 그 어떤 패악도 인내심을 가지고 버티면 만기일에 눈물과 애원을 이자까지 쳐서 돌려줄 것이라 우리는 믿는다. 큰 패악엔 그보다 큰 후회가 약속되어 있을 것이라고.

그런 면에서 테르미네 대공은 전혀 해당 사항이 없다. 정말 드물게도 자존감과 자신감이 낮은 북부대공으로 시작부터 아내 앞에서 안절부절 순종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 모습 또한 반가워할 독자들은 많겠으나 체크카드가 적금을 대체할 수는 없는 법이다. 악시아스 대공 역시 너무나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이기에 독자가 이를 갈게 하지는 않는다. 다만 리에타를 좋아할 일 없을 거라 자신하며 여유만만했던 대공이 애가 타 허둥대는 모습을 보는 일은 본질적으로 후회남 서사의 일종이라 퍽 즐겁다.

그렇지만 고진감래의 기쁨은 슈테른과 타란 대공을 따라올 수 없을 듯하다. 접시를 내던지고, 잔인한 말을 내뱉고, 추운 방구석에 여자주인공을 홀로 내버려 두는 슈테른 대공과 결혼하고 다른 여자를 만나는 일쯤이야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냐며 코웃음 치던 오만한 타란 대공의 추락… 그리고 구르기. 대공들의 눈물샘이 터질 때 독자는 샴페인을 터뜨리고, 대공들이 후회와 절망으로 가슴을 칠 때 독자는 흥분을 주체 못 해 벽을 친다. 그뿐이랴. 매력을 떠나 한 인간으로서 갱생해나가는 모습을 보면 몽글몽글한 흐뭇함마저 피어오른다. 세상에 나쁜 대공은 없다.


나가며

평가 항목이 너무 많아 길고 산만한 글이 되고 말았지만, 이는 곧 대공들의 매력이 이토록 다채롭다는 뜻이니 필연적인 결과가 아닐까. 북부대공, 그들의 매력을 조명할 수 있다면 내 글 따위야 망가져도 좋다.

그보다는 이게 문제다. 본래 이 글은 지상 최고의 북부대공은 누구인가를 논해보고자 경연 목적을 띠고 시작했다. 하지만 중위도에 위치하면서 봄에는 꽃, 여름엔 바다, 가을엔 단풍으로 놀 거 다 놀고 겨울엔 기껏 해야 영하 10도 안팎을 견디는 한반도 주민인 내가 ‘감히’ 북부대공들을 평가하겠다니. 이제 와 생각해보니 너무나 건방진 시도가 아니었을까? 깊이 반성한다. 우리 북부대공들의 추위, 고독, 피로, 우울, 정념과 신념, 그리고 아름다움… 이 모든 것들은 감히 측량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가치를 가늠해 메달을 부여해야 한다면 응당 모두에게 금메달, 아니 왕관이 주어져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니 사죄와 반성의 의미를 담아 제목을 정정하며 부족한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지상 최고의 북부대공은 누구인가?

무엇이 우리 북부대공님(들)을 지상 최고로 만듭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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