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탕 9화] 그녀가 회귀 로판의 주인공인 이유

‘그 비평가가 로맨스 판타지에 고료를 탕진한 사연’은 2022년 3월부터 시작해 벌써 예정한 한 텀이 돌았다. 이 글은 ‘그로탕’의 아홉 번째 글이자 시즌 1의 마지막 글이다. 한 해 동안 우리가 즐기는 로맨스 판타지의 재미와 특성, 사회적 작용과 그 의미를 밝히기 위한 노력이 여덟 번의 글을 통해 나타났다. 클리셰가 난무해서 새로운 것 없이 진부한, 양산형의 스낵컬처라는 오명 속에서 정작 로맨스 판타지가 가리키는 동시대성과 같은 가치는 조명받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아홉 번의 ‘그로탕’의 시도가 다양한 가치를 발굴하는 데 일조했기를 바라며, 마지막 글을 시작한다.

#회귀 #악행 #사랑 #회귀중지 #주인공


회귀 로맨스 판타지 장르의 주인공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거나 돌아감’을 뜻하는 회귀, 이를 소재로 하는 장르는 인생을 되살며 이루지 못한 욕망을 실현하거나 스스로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삶을 되풀이하는 것은 닥쳐올 미래를 안다는 것이고, 예측 불가한 삶에서 이보다 더 큰 특혜는 없다. 게다가 복수나 사회적 성공과 같은 욕망 성취를 노린다면 회귀는 반가운 기회다. 반면 희망적인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주인공에게는 회귀는 시련의 굴레로 작용한다. 특히 여러 번 회귀하며 절망을 반복했다면 알고 있는 미래는 성취의 동력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절망의 좌표일 뿐이다. 반복된 회귀 경험자는 지독한 허무주의자가 될 수 있다. 제아무리 긍정적 사고를 지닌 주인공일지라도 성취 여부와 관계없이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제자리로 계속 돌아간다면 모든 것을 헛되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1)​. 어쨌든 변화해야 하는 숙명의 주인공에게 회귀는 어떠한 의미일까?


힐리스와 줄리엣의 욕망

<접근 불가 레이디>의 힐리스 이노아덴은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여섯 번 죽었고, 또 한 번의 삶에서는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힐리스는 여덟 번을 되살며 거짓 사랑을 구별하고 구걸하지 않게 됐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사랑받기 위해 애쓰지 않고 기꺼이 혼자가 될 수 있던 것은 절망 속에서 진실을 마주한 덕분이다. 온순하고 착하게, 아버지와 오빠, 동생이 바라는 대로, 약혼자가 원하는 대로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이제 하지 않는다. 모든 결말은 항상 절망적이었으므로 힐리스는 자기가 바라는 욕망만을 향해 직진한다. 아버지의 힘을 빼앗고 가주가 된 것도 욕망을 실현하고 싶어서다.

<나오세요, 로미오>의 줄리엣도 힐리스처럼 회귀를 반복하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 질주한다는 점에서 힐리스와 비슷하다. 줄리엣은 사랑하는 로미오와의 해피엔딩을 꿈꾼다. 비극적 결말을 받아들이지 못한 줄리엣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기 위해 회귀한다. 몇 번인지 세는 것조차 포기할만큼 반복된 회귀에서도 번번이 실패하자 더 완벽한 해피엔딩에 매달렸다.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장해물을 제거하는 것에 서슴없었고 죄책감이나 후회는 들지 않았다. 그의 욕망은 오로지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악행

줄리엣은 이번 생에서도 욕망을 굽히지 않는다. 그것이 사랑의 대상인 로미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길지라도 ‘해피엔딩’을 성취하기 위해 거침없이 질주한다. 원하는 대로의 결말이 나타나지 않고 회귀를 반복하는 세계에 대한 미움과 혐오는 줄리엣이 로미오를 제외한 모든 사람과 세계를 적으로 돌리게 만들었다. 줄리엣의 욕망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구나 원하는 바가 있고 성취를 위해 노력하니까. 그렇지만 그의 목표에 공감한다 해도 목표를 이루기 위한 행위까지 공감하기는 어렵다.

<접근 불가 레이디> 40화 中. 일곱 번째 생에서 복수를 감행하고 후회하는 힐리스 이노아덴. 그의 욕망은 복수가 아니었다.

힐리스도 일곱 번째 생에서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 사람들을 향해 복수했다. 힐리스는 그들을 향한 기대,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쉽게 버릴 수 없었기에 일곱 번째 생에서야 복수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여섯 번이나 배신을 당했으면서도 복수를 한 후 후회가 되려 커졌다. ‘나는 왜 지금까지 이런 사람들을 위해 헌신했던 걸까?2)’하는 후회와 자기연민의 감정들이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면 힐리스에게 필요한 것은 복수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여덟 번째 생에서 힐리스의 유일한 바람은 이 비극적인 삶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 복수도, 학대도, 악행도 모두 끊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공허하고 어떠한 행동도 쉽게 할 수 없다. 삶의 의지를 불태울 복수나 무엇인가를 이루고 얻겠다는 성취의 욕망이 아니라 ‘영원한 안식, 완전한 소거, 죽음보다 깊은 죽음3)’이기 때문에.


악행에 대한 공감

일반적으로 복수는 ‘분노, 원한, 울분, 불안, 공포 등’의 감정·정동과 ‘받은 만큼 되돌려주고 당한 만큼 되갚아주는’, ‘손실·손상의 등가교환체계’ 하에 있다. 당하고 살아온 만큼 복수하는 것이 손해 보지 않는 방법이라는 식의 논리는 우리 시대의 정동과 상호작용하여 ‘악인들에 맞서다 스스로 악인이 되어가는 주인공이건, 부와 권력을 지키기 위해 악인이 될 수밖에 없는 적대자이건, 모두 악인’이 되게 한다4).

힐리스는 단호하고 무표정하며 강한 힘으로 복수하지만 악하게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의 공허한 표정이나 후회의 대사 때문만이 아니다. 힐리스는 여섯 번이나 거듭한 생에서 오랫동안 가족으로부터 종속되었고 부당하고 불공평한 학대를 당한 약자라는 것에 이유가 있다. 힐리스가 당한 학대는 사적 영역에서 벌어지며 힐리스를 구원해 줄 공적 시스템은 부재하다. 은폐되고 배제된 영역에서 벌어진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적 복수밖에 방법이 없어 보인다. 힐리스의 상황은 현 사회의 공적 영역에서 책임져야 할 많은 부분들이 개인에게 떠넘겨지면서 나타난 ‘상호결속의 시대의 종말5)’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힐리스 손에 쥐어진 복수의 칼날은 어떻게 휘두른다 해도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사적 복수만이 당해 온 나날을 보상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공감하는 것이다.

복수의 이유에 공감한 이상 힐리스의 복수는 통쾌함을 느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접근 불가 레이디>의 카타르시스는 대리만족의 통쾌함이나 쾌감이 주를 이루지 않는다. 만일 통쾌함과 쾌감을 주려 했다면 힐리스가 복수 후 죽을 이유는 없다. 오히려 새로 맞은 생에서 악행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그 어떤 행위도 쉽게 하지 않는 힐리스를 보며 함께 고민하게 만든다. 그리고 힐리스의 고민에 답을 줄 수 있는 악시온 베르제트가 등장한다.


사랑으로 구원받다

악시온 베르제트는 힐리스가 반복 회귀를 끝낼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줄 신을 마주하기 위해 필요한 인물이자 힐리스 삶의 구원자다. 악시온 베르제트와의 인연은 힐리스의 다섯 번째 생에서 시작됐다. 힐리스는 아버지에게 학대당하던 자신을 구하러 온 악시온을 보고 “나는 앞으로 몇 번을 더 죽었다 살아난다 해도 이 순간을 절대 잊지 못하리라6)”고 예감했다. 영원한 죽음이라는 욕망을 위해서 이외의 것들에 의미를 두지 않던 힐리스는 악시온에게 점점 빠져든다. 두 사람의 사랑은 힐리스가 ‘영원한 안식, 완전한 소거, 죽음보다 깊은 죽음’을 원하는 이상 이뤄질 수 없다. 그래서 힐리스는 이성적으로 사랑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악시온은 힐리스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면서도 사랑을 멈추지 않는다. “그게 뭐든 전부 나랑 해7)”하고 말하며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행동까지 이해하는 악시온의 사랑은 힐리스가 허무주의의 늪에서 빠져 나오도록 구원한다.

사랑 없이 자신을 이용하고 괴롭혔던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사랑하지 않지만 존재하게 만드는 사람8)’들이기에 마음껏 미워할 수도, 복수할 수도 없는 힐리스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가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않도록 제어하는 것이었다. 모순적이게도 힐리스의 이런 비극적 운명을 끝내 이겨낼 수 있는 건 감정, 즉 ‘사랑’이다. ‘사랑’은 감정이기 때문에 비합리적일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반대로 ‘특정 종류의 의미나 가치를 지각할 수 있게 한다’. 감정의 결여야말로 ‘타인과의 유대를 통해 어느 지점에서 자신의 삶이 완성되어야 하는지를 보지 못하는 무능과 같은 것9)’이기 때문이다.

가족의 사랑이 결핍으로 작용해 자신의 삶을 완성시키지 못했던 힐리스에게 악시온은 결핍을 채울 수 있는 존재이며 악시온과의 사랑의 감정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힐리스는 반복하는 비극의 결말을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이다.


악행을 멈추기 위한 선택

한없이 사랑을 베푸는 존재로 힐리스에게 악시온이 있듯이 줄리엣에게는 아버지와 티볼트가 있지만, 줄리엣이 원하는 것은 로미오와의 해피엔딩이기에 아버지와 티볼트가 베푸는 사랑은 줄리엣의 질주에 도구가 될 뿐이다. 주변을 돌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질주한 탓에 줄리엣의 바람과는 다르게 몬터규가의 로미오는 커퓰릿가의 줄리엣을 원수로 여기게 되어 버리고 만다. 어디에서부터 힐리스와 줄리엣의 차이가 발생한 것일까? 줄리엣의 실수는 회귀자들이 곧잘 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착각에서 비롯된다. 알고 있다는 착각으로 줄리엣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고 비합리적인 행동으로 발현됐다. 회귀를 당하는 입장의 줄리엣이 회귀한 세계의 설계자가 되려고 벌이는 행동은 반복된 회귀로 인해 모두 알고 있다는 착각에 기인한다. 그래서 줄리엣은 힐리스와 다르게 너무 많이 행위하며 비윤리적 주체가 되어 버린다.

<나오세요, 로미오> 67화 中. 줄리엣의 아리아(3) - 줄리엣은 운명처럼 로미오와 만나 사랑에 빠진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두 사람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나고 줄리엣은 해피엔딩을 맞기 위해 회귀를 한다.

줄리엣이 해피엔딩을 바라며 하는 모든 행위는 작중 ‘로미오와 줄리엣’의 설계자(작가)가 원하는 일이다. 설계자는 자신이 만든 ‘로미오와 줄리엣’의 결말대로 매번 흘러가길 바란다. 그는 줄리엣이 아무리 애써도 바라는 해피엔딩으로 가지 못하는 것에 도리어 기뻐했다. 이것을 알게 된 줄리엣은 최종적으로 회귀하지 않는 선택을 감행한다. 그것이 바로 설계자가 원하지 않는 일이란 것을 깨달은 덕분이다. 그리하여 줄리엣은 회귀를 멈추고 본래의 이야기로 돌아가 로미오의 죽음과 비극적 결말을 받아들인다. 역설적으로 끝을 받아들이는 순간 줄리엣은 주인공이 되어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써나갈 수 있게 된다. 그토록 거부하던 로미오의 죽음은 줄리엣의 삶에서 일부분이자 과정일 뿐이다. 삶의 잔인한 속성, 삶은 불공평하며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할 때 삶에 대해 겸손해지고 정체성의 면면이 구축되어 간다. 그래서 줄리엣은 행위하지 않는 윤리적 주체로서 주인공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회귀 중지

힐리스가 원하는 완전한 죽음은 물리적인 죽음이기보다는 회귀를 멈추고 과거의 고통으로부터 분리하고 싶은 욕망일 것이다. 뒤늦게 깨닫긴 했지만 줄리엣도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됐다. 과거에 사로잡혀 있을 때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그들의 과거에 연민을 느껴 악행을 탓하기 어려울지라도, 주인공인 이상 더 큰 사랑의 힘으로 자신의 삶을 완성할 수 있도록 욕망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세계는 손실/손상의 등가교환체계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 인생은 불공평하다는 것, 우리는 결코 타인과 세계를 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 편견 없이 타인과 세계를 대면하며 다름을 인식하고 받아들여야만 ‘나’의 정체를 밝힐 수 있다는 것. 이러한 성찰이 주인공에게 필요했기에 힐리스와 줄리엣은 회귀했다. 사적 욕망의 실현을 위해 회귀라는 벌 혹은 보상이 주어진 것이 아니다. 생을 되풀이하며 과거를 마주할 때마다 조금씩 자신의 삶과의 거리를 넓혀가며 과거에 사로잡힐 것이 아니라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사랑을 통해 성장해야 하고, 성장을 통해 사랑해야 한다. 타인과 세계를 향한 사랑 없이 자기연민에 빠진 주인공은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이렇게 이야기 속 주인공이 질주를 멈출 때 우리는 고통 속에서도 주체성을 잃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형성해가는 주인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1) 영화 <사랑의 블랙홀>에서 기상캐스터로 등장하는 빌 머레이를 떠올려보자. 골드키위새 작가의 웹툰 <죽어도 좋아>의 이루다도 마찬가지다. 반복된 회귀를 맞는 주인공은 회귀의 굴레를 지옥처럼 여길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새로운 마음으로 되풀이해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면, 미래를 꿈꿀 수 없다. 우리는 불공평하고 우연성으로 점철되어 있어 삶에 불안하고 두려움을 느껴 보장된 미래를 희망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미래에 대한 예측불가함이 우리를 살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희망을 갖고, 희망 고문이 되지 않게 노력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

2) 용두식, 시조새, ZI.O, 밍숭, 킨, <접근 불가 레이디> 14화의 대사, 카카오페이지.​

3) 용두식, 시조새, ZI.O, 밍숭, 킨, <접근 불가 레이디> 73화의 대사, 카카오페이지.​

4) 인용구(‘’) 출처: 신주진(2018), 「복수극을 통해, 복수극을 넘어: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 나타난 복수 중지의 윤리성」, 『여성이론』 38호, pp.132~155.​

5) 신주진(2018), 앞의 논문, p.140.(지그문트 바우만, 『액체 근대』, 이일수 옮김, 강, 2005, p.194.를 인용하며)​

6) 용두식, 시조새, ZI.O, 밍숭, 킨, <접근 불가 레이디> 40화의 대사, 카카오페이지.​

7) ​용두식, 시조새, ZI.O, 밍숭, 킨, <접근 불가 레이디> 78화의 대사, 카카오페이지.​

8) 골드키위새, <순정 히포크라테스> 시즌3 18화의 대사, 카카오웹툰.​

9) 마사 누스바움, 『시적 정의: 문학적 상상력과 공적인 삶』, 박용준 옮김, 궁리, 2013,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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