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탕 5화] 육아물 로판 속 어린이라는 세계

*육아물 로판 속 어린이라는 세계 본 제목의 표현은 김소영의 에세이 제목 ‘어린이라는 세계’에서 따온 것이 맞다. 다만 통상적으로 4세에서 초등학생의 아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한 어린이를, 본고에서는 영유까지도 포괄하는 의미로 썼음을 밝힌다.


육아물 로판을 읽는 마음

로맨스판타지라 하면 자연스레 남녀주인공의 로맨스나 여성 주인공을 단독으로 한 활약상 중심의 이야기가 가장 먼저 떠오를 테지만, 사실 로판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육아물’이다. 육아물 로맨스판타지는 아이의 양육 과정이 중심 서사가 되는 작품군으로, 비육아물 로판과 구별해 하나의 세부 장르로 굳어질 만큼 인기가 있다. 회귀·빙의·환생을 거치고 중세(로 추정되는 어딘가)를 배경으로 한다는 것은 육아물과 비육아물 모두 공통적으로 뼈대 삼는 설정이지만, 육아물 로판은 로맨스보다 가족애를 통해 정체화된다. 무엇보다도 양육을 중심 소재로 하기에 영유아 시절이 서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이 비육아물 로판과 구별되는 큰 차이라 할 수 있다.

‘어린아이의 몸에 들어간 성인 주인공이 애교나 재능을 발휘해 아버지나 오빠 등 주변 인물이 자신을 사랑하도록 만든다.’ 보는 이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문학연구가 안지나는 육아물 로판의 창작 및 감상 동기를 “아주 개인적이고 섬세한 것”이라 긍정적으로 명명한다. 그는 평소 심상하게 즐겨 보던 한 육아물 로판의 창작 동기가, 가족으로부터 사랑받는 이야기를 씀으로써 실제 가정의 불화를 견디고자 한 것임을 알게 된다. 적당히 가공된 것이라 생각하고 읽어왔던 작품이 내밀하고 절실한 심정에서 향유되어온 것임을 깨닫자 “아주 개인적이고 섬세한 것을 함부로 엿보고 재단한 듯한 부끄러움을 느꼈”음을 고백한다1).

한정 없이 사랑받는 기쁨이라든지 주인공의 성장을 지켜보는 보람 등 읽어보지 않고는 알기 어려운 육아물 로판만의 즐거움과 유익이 분명 있다. 사실 돌봄 받고 싶은 욕망이란 것은 생애주기와 무관한 인간의 항시적인 욕망 아닌가. 욕망을 투명하게 반영해 판타지로 구현해내는 것이야말로 로판의 장기이자 정체성이기에, 그 노골적인 표현에 거부감을 표하는 것은 오히려 새삼스럽다.

하지만 작품을 읽으며 넘실대던 즐거움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 무시하기 힘든 찜찜함이 남는다. 작품의 창작과 감상에 개입된 욕망이 얼마나 진정성 있는 것인지, 보살핌의 대상으로 남고자 하는 욕구가 정말로 나쁜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접어두고라도 로판이 어린이를 그려내는 방식이 비판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여전히 있다고 생각된다. 작품의 재미와 감동을 설계하기 위해 동원된 어린이의 모습이 성인 향유자의 입맛에 맞춰 지나치게 가공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탓이다. 이 장르가 주는 즐거움을 무턱대고 폄하하고 싶지 않기에 논의의 시작에 앞서 육아물 로판이 주는 재미와 감동을 미리 적어두는 바이다.


무조건 귀여울 것, 최선을 다해 귀여울 것

로판이 그려내는 어린아이들은 귀엽다. 정확히는 귀엽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느낌이다. 그들은 미모의 부모를 닮아 신생아 때부터 ‘인형 같은’ 외모를 가진다. <중매쟁이 아가 황녀님>(웹툰 박카린, 원작 지미신)과 <황제의 외동딸>(웹툰 리노, 원작 윤슬)의 주인공들은 거의 인간 아이라 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그려진다. 이등신(혹은 가분수)으로 그려진 갓난아기 시절은 앙증맞은 모습을 극대화한 형태이며, 좀 더 자란 뒤에도 한 팔에 폭 들어오는 크기여서 사람이라기보다는 인형에 가깝다는 인상을 준다.

외형만큼이나 행동거지 역시 귀엽다. <황제의 외동딸>과 <왕의 딸로 태어났다고 합니다>(웹툰 김렉나 외, 원작 비츄)의 주인공들은 폭군 아버지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눈치껏 애교를 부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수함을 가장하며 유년을 보낸다. <대마법사의 딸>(웹툰 문설아/새벽애, 원작 문설아)과 <나는 이 집 아이>(웹툰 코튼, 원작 시야)의 주인공들은 그렇게까지 영악한 인물은 못 된다. 하지만 학대당한 경험으로 인해 미움받을 것이 두려워 매사 눈치를 보고 욕심을 부리지 않는 덕에, 악을 쓰고 투정 부리는 여느 아이들과 달리 온순하고 귀엽다는 칭찬을 듣는다.

<황제의 외동딸> 20화 中

귀여움에 관한 김홍중의 논의를 참고하면, 이들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하필 귀여움이라는 사실은 그 자체로 그들의 위치성을 고민하게 한다. “귀여움이란 전형적으로 강자가 약자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귀여운 존재와 귀여워하는 존재 사이에는 위계가 존재한다. 귀여움은 지배당하고 사육되는 존재에서 비롯되는 감정이지 모호하고 통제 불가능한 존재로부터 포착되는 감정이 아니다. 육체적으로 앙증맞고 뒤뚱거리며, 정신적으로는 어리고 적절히 의존적인 대상이야말로 귀엽다. 애교는 이 귀여운 존재들에게 통상 기대되는 행동이다2).

거의 모든 작품에 인간 외 동물적인 존재들이 인간 아이만큼이나 귀여운 존재로 등장하는데, 이 사실 역시 이러한 맥락에 놓여 있다. 주변의 어른들이 어린 주인공을 귀여워하듯 주인공은 자신의 애완동물을 귀여워한다. 이때 그 대상은 평범한 고양이나 강아지뿐만 아니라 위압감을 유발할 법한 이무기나 드래곤까지도 해당된다. <무협지 최고 악당의 귀한 딸입니다>(웹툰 다우/쌀국수, 원작 솔땀)의 이무기는 사람을 잡아먹는 위험한 존재임에도 곧잘 단순화된 귀여운 형태로 그려진다. <대마법사의 딸> 세계관 내 가장 흉폭한 종족으로 악명 높은 드래곤은 주인공이 이름을 붙여주는 순간 작고 귀여운 아기 드래곤으로 돌아가버린다. 거부감을 일으킬 만한 비늘을 단순화하든 날카로운 송곳니를 생략하든, 아무튼간에 가능한 한 ‘귀여운’ 모습이 될 수 있게끔 말 그대로 뼈를 바꾸고 태를 빼낸다.

<대마법사의 딸> 35화 中

그리고 로판이 애완동물을 대하는 이러한 방식은 인간 아이를 다루는 방식과 무척 유사하다. 반려동물이라는 말이 보편화된 요즘 같은 때에 굳이 ‘애완’동물이란 표현을 쓴 것은, ‘좋아하여 가까이 두고 귀여워하거나 즐긴다’는 의미의 애완이야말로 이들의 재현 방식을 설명하기에 적절한 용어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작품들의 주인공이 하필 토끼나 강아지에 비유되곤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매서운 드래곤이 발톱을 숨기고 온순하게 큰 눈은 부각하는 방식으로 그려진 모습은 지나치게 짧은 팔다리와 이등신의 몸체로 재현되는 인간 아기를 상기시킨다. 주인으로 각인한 이에게 유독 온순한 모습은 요령껏 눈치 보며 착하게 구는 어린이의 모습과 흡사하다. 동물과 인간 아이 모두 귀여움을 전시하기에 최적화된 방식으로 재현되어 작중 어른들을, 그리고 작품을 감상하는 독자들을 기쁘게 한다.


환영받는 ‘아이다움’, 추방당한 ‘애 같음’

한편 귀여움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유능함’ 혹은 ‘성숙함’이다. 환생하며 전에 없던 능력을 부여받거나 원작 소설을 읽어 미래를 아는 등 주인공이 특별한 능력이나 혜안을 가진 존재로 그려지는 것은 어떤 작품이든 나타나는 로판의 기본값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어린이의 몸을 통해 드러날 때 그 남다른 탁월함은 유독 부각될 수밖에 없다. 남다르기 때문에, 즉 ‘다른 아이’라면 결코 할 수 없는 일들을 너끈히 해내고 ‘보통의 아이’라면 일으킬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무협지 최고 악당의 귀한 딸입니다>는 환생한 로판 주인공이 획득할 수 있는 모든 특혜를 쥐고 시작되는 이야기다. 주인공 천리화는 전생의 기억을 가졌기에 성인의 자아를 가지고 있다. 소설 속으로 환생한 터라 사건의 흐름을 꿰고 있으며 선천적으로 타고난 무력 역시 상당하다. 인형 같은 외모로 눈치껏 착하게 구니 귀엽고 사랑스러움은 말할 것도 없다. 천리화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은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며 남다른 매력을 예찬하는 동시에 어른을 능가하는 천재성에 감탄한다. ‘아이답지 않게’ 예의 바르고 영민하다는 것이다.

<무협지 최고 악당의 귀한 딸입니다> 30화 中

특별하고 사랑받는 주인공을 그려나가는 과정에서 특정한 무엇이 ‘아이다움’으로 상정되고 그것이 용인 혹은 배제되는 양상은 주목할 만하다. <나는 이 집 아이>의 에스텔 역시 ‘아이답게’ 마음껏 투정 부려도 된다는 애정 어린 말을 듣지만 그가 사람들의 애정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아이 같지 않게’ 울고 떼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귀여움은 용인을 넘어 적극적으로 요구되는 아이다움이다. 육아물 로판의 주인공들은 무뚝뚝한 아버지를 유혹(?)하기 위해, 사이가 나쁜 어른들 사이의 긴장감을 완화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획득하기 위해 귀여움을 수행한다. 순진무구함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을 향해 살의를 내비치는 아버지 앞에서, 해결하기 곤란한 어른들의 사정 앞에서, 주인공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얼굴로 주변 어른들을 안심시킨다.

그러나 칭얼거림, 과도한 감정의 표출, 미숙함, 이기적인 태도 같은 것들은 허락되지 않는 ‘아이다움’이다. 성인의 영혼을 품은 어린 주인공은 모든 순간에 절제하며 정답을 아는 것처럼 행동한다. 우는 것을 성가셔하는 폭군 아버지 앞에서 울지 않음으로써 호의를 얻어내고, 또래 아이들은 물론 성인을 능가하는 능력을 보여줘 감탄을 자아낸다.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해 떼를 쓰거나 미숙하고 어설프게 행동하는 것은 아이답다기보다, 말하자면 ‘애 같은’ 일이다. 그리고 그런 애 같은 일은 어디까지나 ‘다른 아이’나 ‘보통의 아이’의 것이다.

많은 육아물 로판들이 비좁은 규격으로 아이답다는 말을 한정해 ‘일반적인’ 아이의 모습을 획일화한 뒤 그 대척점에 자리한 주인공만을 예외적 존재로 추켜세우는 일을 반복한다. “아동을 특정한 속성으로 환원하고 그에 열광하면서도, 그 속성을 벗어난 모습을 견디지 못”한다3). 이는 허용된 아이다움이라는 규격 밖에 존재하는 모습들, 혹은 규격 외의 어린이 자체를 배제하는 일로 이어지기에 무시할 수 없는 현상이다. 주인공의 특별함을 그려내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아이와 보통 아이를 호출하고 그들을 편견 안에 집어넣어 평가절하하는 일이 불편한 것은 그래서다.

사실 이런 방식의 재현은 다른 매체에서도 곧잘 목격되곤 한다. 아동을 주인공으로 내건 TV와 유튜브 콘텐츠들 역시 “먹고 배설하고, 피와 땀을 지닌 ‘축축한’ 존재”로서의 아이를 견디는 과정을 생략한 채 예측 가능한 선 안에서만 칭얼대는 사랑스러운 아기를 미디어 이미지로서만 경험하게 돕는다. 채널을 구독하고 ‘좋아요’를 클릭하는 것만으로 육성에 참여하고 있다는 감각을 제공하는 이 편의적 판타지는, 현실의 입체적인 아동을 편집해 그저 관람 대상으로만 남게 한다. 그 결과 어린이는 “낭만적이고 미적인 대상이자 배제와 거부의 대상인 ‘타자’4)”가 되어, 아이답지만 애 같아서는 안 된다는 모순된 지침 위에서 사랑받기 위한 줄타기를 아슬아슬하게 이어나가야 한다.


어린이라는 이세계(異世界)를 상상하기

향유 동기의 진정성과 결과적으로 얻는 유익이 분명히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과정에 대한 비판을 거부할 이유는 되지 못할 것이다. 어린이는 곧잘 로판의 주조연으로 등장하지만 그들이 향유자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 스스로 창작할 수도 감상할 수도 없기에 재현은 쉽게 일방적인 형태가 된다. 타자화되는 대상이 장르의 향유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재현이 더욱 부당하다고도 느껴진다. 누군가를 갈취에 가까울 만큼 일방적으로 타자화하는 방식으로 획득되는 즐거움이 지속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더욱이 ​어떤 면에서 만화는 오로지 관람 목적의 편리한 판타지를 제공하기에 최적화된 매체일지도 모른다. 의도에 맞춰 이미지의 생략과 과장이 용이하다는 점에서 모든 것을 귀여운 존재로 환원시킬 수 있으며, 성인의 모습을 연기하는 드라마 속 아역 배우보다도 능숙하게 진짜 성인의 정신을 가진 유능한 아이를 실현할 수도 있다. 어린이로의 회귀, 빙의, 환생이라는 판타지적 장치가 어린이라는 세계에 대한 상상의 필요성을 제거하는 쪽으로 기능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유감스럽다.

재밌자고 보는 로판에 너무 지나친 잣대를 들이미는 것일까? 그렇게 물을 수도 있겠지만, 이미 로판은 여성의 재현 방식을 다각화하는 고민을 해온 바 있다. 악녀를 주인공 삼고 여성과 여성의 적대 관계를 연대 관계로 새롭게 쓴 시도들은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다양하게 분화된 이야기 형태가 나름의 성취를 방증한다. 그것은 진부해진 클리셰를 탈피하려는 유희의 목적이기도 했으나 납작하게 답습되어온 여성 이미지를 전복하려는 저항의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로판이 어린이를 그려내는 방식 역시 그런 상상력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로판을 추동하는 다른 세계로 향하고자 하는 욕망과 의지의 일부를 어린이라는 세계를 상상하는 데 할애한다면 어떨까. 한계라고 여겨지는 어린이들의 특징이 제약이 아니라 조건이 되어 새로운 이야기의 길잡이가 되어줄지도 모른다. 어린이임에도 불구하고 쓰이는 이야기보다 어린이이기에 가능한 이야기를 보고 싶다. 익숙함과 낯섦이 공존하는, 그러나 아직 제대로 그려보지 않은 세계의 이야기를 말이다.

1) 안지나, 『어느 날 로맨스 판타지를 읽기 시작했다』, 이음, 2021, ebook 참고.​

2) 김홍중,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69~70쪽.​

3) 김원영, 「낭만적 예찬을 넘어서」, 『창비어린이』 17(1), 32쪽.​

4) 같은 글, 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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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칼럼의 후일담은 팟캐스트 '웹투니스타'의 파일럿 방송 <그 비평가가 로판에 고료를 탕진한 사연>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방송 들으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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